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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로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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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з серии: 마법사의 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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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토르, 리스왕자, 오코너, 엘덴, 에레크 명장은 타오르는 모닥불 가까이 빙 둘러 앉았다. 누구 하나 말이 없었고 모두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한여름 밤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소용돌이치며 부는 신비스런 바람이 영원히 사라지질 않을 것 같은 안개와 뒤섞여 차가운 기운을 빚어냈고 덕분에 뼛속까지 춥고 눅눅했다. 토르는 앞으로 몸을 숙여 모닥불 가까이에 손을 비볐지만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일행이 챙겨와 나눠준 육포를 뜯어먹었다. 형편없이 질기고 짰지만 그런대로 허기를 달래줬다. 에레크 명장이 토르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는 순간 손끝에 부드러운 가죽 포대의 감촉이 전해졌다. 가죽 포대 안으로 찰랑거리는 액체의 무게가 상당했다. 토르는 포대를 들어올려 오랫동안 입에서 떼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처음으로 몸에 온기가 돌았다.

모두들 입을 다문 채 불꽃만 주시했다. 토르는 여전히 안절부절 못했다. 캐니언 협곡을 건너와 적들의 영토에 머문다는 사실에 한시라도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편 토르는 뒷마당에 앉아있는 듯한 에레크 명장의 차분한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안심이 되었다. 비록 와일즈였지만 에레크 명장이 함께 있었고 다같이 모닥불 앞에 앉아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명장은 숲을 주시하며 모든 소리에 주위를 기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감 있고 편안해 보였다. 어떤 위험이 닥쳐도 토르 일행은 에레크 명장의 보호 하게 안전하리라 확신했다.

모닥불을 마주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주변을 살펴보니 모두들 안심하고 있는 눈치였다. 다만 엘덴만은 예외였다. 숲에서 나온 뒤로 계속 시무룩했다. 오전에 보여줬던 넘치는 자만심은 온데간데 없었고 검을 잃은 채로 줄 곳 뚱한 모습이었다. 콜크 사령관은 분명 무기를 잃어버린 실수를 절대 용납 안 할 것이다. 돌아가면 엘덴이 왕의 부대에서 제명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엘덴이 어떻게 위기를 넘기려 할지 궁금했다. 엘덴이 그렇게 손쉽게 무기 없이 부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꼼수를 쓰던, 대책을 마련하던 비장의 카드를 생각해 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무엇이든 그다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 게 분명했다.

토르는 고개를 들어 에레크 명장이 주시하는 곳을 따라 서쪽의 먼 경계선을 바라봤다. 희미한 불빛이 끝도 없이 쭉 늘어져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불빛의 정체가 궁금했다.

“저게 뭐죠? 불빛의 정체가 뭐죠? 명장님께서 주시하고 계신 불빛이요.”

토르가 질문을 건넸다.

명장은 오랫동안 답이 없었다. 오직 부서지는 바람소리만이 정적을 채워주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명장은 토르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고랄족이다.”

일행들과 시선을 주고 받은 토르는 그들의 눈빛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고랄족이란 말에 토르도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고랄족들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겨우 숲 하나와 드넓은 평지를 사이에 두고 고랄족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미 캐니언 협곡을 건너왔기에 캐니언 협곡의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위치였다. 어렸을 때부터 고랄족에 대해 들어왔다. 링 대륙을 침범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흉포한 야만생명체. 게다가 지금 이곳은 보호막이 없는 와일즈 영토였다. 고랄족의 규모 또한 믿을 수 없이 대단했다. 이들은 방대한 수의 군대를 이뤄 대기 중이었다.

“두렵지 않으세요?”

토르가 에레크 명장에게 질문했다.

명장이 고개를 저었다.

“고랄족은 다같이 한번에 움직인다. 고랄족의 군대는 매일 밤 저곳에서 주둔한단다. 몇 년 동안 그래왔어. 고랄족이 침범할 땐 모든 병력을 총 동원해 한번에 캐니언 협곡을 쳐들어 올 거야.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운명의 검이 보호해주고 있으니까. 저들 또한 캐니언 협곡을 뚫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단다.”

“그렇다면 왜 저기서 주둔하는 거죠?”

토르가 물었다.

“저들만의 협박방식이지. 그리고 준비하고 있는 거란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선대의 고랄족들은 이미 수 차례 공격을 시도했고 캐니언을 뚫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지. 그렇지만 내 생애에 고랄족들의 침략시도는 없었어.”

머리 위로 노랑, 파랑, 주황빛으로 반짝이는 별들이 새까만 하늘 위를 밝혔다.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캐니언의 반대쪽, 이곳 와일즈는 늘 그렇듯 상상을 뛰어넘는 끔직한 곳이었다. 이에 토르는 두려웠지만 이내 침착해졌다. 왕의 부대 부대원으로서 그에 걸맞게 행동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에게 운명의 검이 있는 한 저들을 절대 공격 못 할거야.”

토르의 심정을 눈치챈듯한 명장이 토르를 안심시켰다.

“만져본 적 있으세요? 운명의 검 말이에요.”

“물론 없지, 왕의 후손이 아니면 그 누구도 시도해 볼 수 없어.”

명장의 대답이 날카로웠다.

혼란스러워진 토르는 명장을 바라봤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런 거죠?”

이때 리스 왕자가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설명해도 될까요?”

에레크 명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운명의 검에는 전설이 하나 있어. 사실 운명의 검을 들어올린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어. 전설에 따르면 선택 받은 자만이 그 검의 주인이 된대. 왕의 신분이어야만 그 검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혹은 왕의 후손으로써 왕의 후계가 된 사람만이 시도해 볼 수 있어. 그래서 운명의 검은 아직도 주인 없이 잠들어 있는 거야.”

“그렇다면 지금의 폐하께서는요? 왕자님의 아버지께서는요? 폐하께서 들어보시면 되잖아요?”

리스 왕자는 고개를 숙였다.

“폐하도 시도해 보셨어. 딱 한번. 왕위를 계승하시던 날. 그리고 나서 말씀해주셨지. 들 수 없었다고. 운명의 검은 폐하께는 질책의 대상이야. 그 검을 싫어하시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폐하를 괴롭히는 존재거든. 선택된 자가 나타난다면, 링 대륙은 모든 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우리 모두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풍요로워질 거야. 더 이상의 전쟁도 없어지고.”

“동화책에나 나오는 꾸며낸 소리야.”

엘덴이 끼어들었다.

“그 검은 누구도 못 들어. 너무 무거워. 드는 건 불가능해. 더군다나 ‘선택된 자’가 어디 있어. 다 헛소리야. 그 전설이란 게 평민들 다스리기 편하자고 만든 거라니까. 백성들이 목이 빠지게 ‘선택된 자’가 나오길 기다리게. 그래야 맥길 가문이 좀 그럴듯해 보이지. 전부 왕족 편의 봐서 지어낸 전설이야.”

“말조심해.”

에레크 명장이 쏘아붙였다.

“어디서 감히 함부로 왕족에 대해 무례하게 말하는 거냐.”

풀 죽은 엘덴은 고개를 떨궜다.

토르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한번에 이해하기엔 무리였다. 평생토록 운명의 검을 직접 보는 순간을 꿈꿨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검의 모양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누구도 검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밝혀내지 못했고 분명 마법의 무기일거라는 예측만 떠돌 뿐이었다. 만약 운명의 검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궁금했다. 미개의 왕국에게 폐하의 군대가 붕괴될까? 토르는 저 멀리 경계선 너머에 머무는 반짝이는 불빛을 다시 바라봤다. 불빛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 너머로 가본 적 있으신가요? 저 멀리에요. 숲을 지나서요. 와일즈 안으로요.”

토르가 명장에게 질문했다. “

나머지 일행도 고개를 돌려 에레크 명장을 바라봤다. 토르는 명장의 대답이 참을 수 없이 궁금했다. 허나 무거운 침묵만 이어졌다. 에레크 명장은 고랄족의 불빛을 계속해서 주시할 뿐이었다. 질문이 묻혀버린 것 같았다. 토르는 너무 꼬치꼬치 캐물은 게 아닌가 염려됐다. 에레크 명장에게 감사하고 의지하는 만큼 명장이 자신의 좋은 면만 봐주길 원했다. 게다가 토르 자신도 사실은 명장의 대답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차라리 질문을 거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명장의 대답이 들려왔다.

“가봤단다.”

명장의 목소리가 엄숙했다.

엄숙한 분위기가 모두에게 전달되어 긴 침묵이 흘렀다. 더 이상의 설명 없이도 명장의 대답에서 깊이가 밀려왔다.

“그곳은 어떤가요?”

오코너가 물었다.

오코너의 질문에 토르는 안도했다. 어려운 질문을 오코너가 대신 건넨 순간이었다.

“그 곳은 무자비한 왕국이 지배하고 있지. 그렇지만 영토가 광활하고 그 모습도 다양해. 야만생명체의 땅이 있고 노예들의 땅이 있지. 괴물들의 땅도 있단다. 너희들이 쉽게 상상조차 못할 괴물들이지. 그 곳에는 무수한 사막과 산과 언덕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셀 수 없이 많은 습지와 늪과 멋진 바다가 있지. 마법사의 땅이 있고 용의 땅도 있단다.”

토르는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이요? 용은 존재하지 않잖아요.”

토르를 바라보는 에레크 명장의 눈빛이 유달리 진지했다.

“장담컨대, 용은 존재 한단다. 그리고 그곳엔 절대 가고 싶지 않을 거다. 고랄족들 마저 두려움에 떠는 곳이야.”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 깊숙한 곳까지 모험을 했다는 게 토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명장이 어떻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기회가 되면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끝없이 솟구쳤다. 미개의 왕국이 어떤 모습인지 또 누가 그 왕국을 지배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들이 왜 침략을 꿈꾸는지도 궁금했다. 명장이 그곳에 간 건 언제이며 언제 돌아왔는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토르는 질문 대신 모닥불을 바라봤다. 불빛이 약해지고 날이 더 추워졌다. 머릿속이 질문으로 가득했고 그럴수록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더 이상 물어보기엔 이미 너무 늦은 밤이었다.

질문 대신 잠을 청하기로 했다. 땅바닥에 머리를 뉘여 눈 앞에 이국 땅의 흙을 바라봤다. 언제쯤 다시 부대로 돌아갈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궁금함을 품으며 눈을 감았다.

*

눈을 뜬 토르는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어디에 있고 또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지 납득이 안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슴까지 안개가 자욱해 발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캐니언 협곡 위로 동이 트고 있었다. 왕궁은 저 멀리 캐니언 협곡 너머에나 있었다. 여전히 토르는 캐니언 협곡의 반대쪽에 있었다. 협곡의 외각, 미개의 영토였다. 심장이 요동쳤다.

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어찌된 영문인지 경계를 서는 실버 대원이 한 명도 없었다. 다리가 너무 황량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막막했다. 다리를 이어주는 나무 널빤지가 도미노처럼 하나씩 떨어져나갔고 순식간에 붕괴된 다리가 절벽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절벽 바닥의 깊이를 대변해주듯 무너져 내린 다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고개를 돌려 일행을 찾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뭘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이곳, 캐니언 협곡의 반대편에서 무너져 내린 다리를 뒤로하고 토르는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다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이었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옮겨 숲을 살폈다. 움직임이 감지됐다. 토르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걸어갈 때마다 발이 땅에 잠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뭇가지 위에 매달린 그물이 하나 보였다. 동그랗게 돌고 있는 그물 안에는 엘덴이 갇혀 있었다. 엘덴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뭇가지가 삐걱거렸다.

매 한 마리가 엘덴의 머리 위에 앉아있었다. 양쪽 눈 가장자리에서 이마까지 검은 줄이 나있었고 몸에서는 은빛 광이 흐르는 게 예사로운 생김새가 아니었다. 매는 몸을 구부려 엘덴의 눈알을 뽑아 물었다. 부리 안에 눈알을 문 채 몸을 돌려 토르를 주시했다.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엘덴이 죽었다는 걸 확인 한 순간 숲 전체에서 갑자기 빠른 움직임이 느껴졌다. 사방으로 고랄족의 군대가 등장했다. 거대한 크기의 고랄족은 허리에 천 하나만 두른 차림새였다. 근육이 왕성하게 발달된 넓은 가슴에 얼굴 한가운데 코가 세 개나 있었다. 양 쪽의 송곳니는 몹시 길고 날카로운 곡선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고랄족들은 으르렁거리며 전속력으로 토르에게 돌진했다. 몸서리쳐지는 소리였다. 그 어디에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손을 뻗어 검을 찾았지만 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토르는 숨을 가쁘게 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광적으로 온 사방을 둘러봤다. 주위는 고요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정적만 울렸다. 꿈에서 본 적막이 아니었다.

새벽의 첫 번째 빛 아래 살펴보니 토르 옆으로 리스왕자, 오코너, 에레크 명장이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쭉 뻗고 잠에 취해있었다. 그들 옆으로는 다 타버린 불씨만 남아 있었다. 바닥에서 매가 한 마리 낮게 뛰었다. 매는 몸을 돌려 토르를 향해 머리를 젖혔다. 몸집이 컸고 은빛 매무새가 당당해 보였다. 눈 사이로 난 검은 줄이 이마까지 이어져 있었고 토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토르와 눈을 맞춘 매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몸서리가 쳐졌다. 꿈 속에서 본 그 매였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매가 암시를 보내고 있었다. 토르가 꾼 꿈은 단순한 꿈 그 이상이었다. 불길했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양 팔로 미세한 전율이 느껴졌다.

재빨리 일어서 주위를 살펴봤다. 혹시 뭐가 잘못됐는지 알아내야 했다. 아무 소리도 없었고 없어진 것도 없었다. 다리도 그대로였고 실버 대원들도 다리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슨 암시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한 사람이 없었다. 엘덴.

처음에는 엘덴이 토르 일행을 떠난 거라 생각했다. 다리를 건너 안전한 캐니언 협곡으로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검을 잃어버린 수치심으로 부대를 완전히 떠난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숲 쪽을 살펴보니 이끼 위로 눌린 자국이 보였고 아침 이슬 덕에 지나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틀림없는 엘덴 발자국이었다. 엘덴은 떠난 게 아니었다. 숲으로 들어가버렸다. 혼자서 말이다. 엘덴도 기분 전환이 필요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곧 토르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엘덴의 목적은 잃어버린 검이었다.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가버리다니. 엘덴이 얼마나 왕의 부대에 집착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엘덴이 위험한 것 같았다. 엘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게 분명했다.

토르의 예감이 맞는다는 듯 때맞춰 매가 다시 울었다. 그리고는 도약해서 공중으로 부양해 토르의 얼굴에 돌진했다. 고개를 숙여 간신히 매의 발톱을 피했다. 다시 높이 오른 매는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토르는 재빨리 움직였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엘덴의 발자국만 따라 숲 속으로 질주했다.

혼자서 엘덴을 찾으러 나선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오히려 멈추지 않고 전속력으로 와일즈 영토 깊숙이 달렸다. 만약 지금 멈춰서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지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옴짝달싹 못하고 겁에 질려버릴 것 같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 계속 몸을 움직였다. 엘덴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만이 전부였다. 토르는 이른 새벽빛을 받으며 숲 속으로 쉬지 않고 달려갔다.

“엘덴!”

토르가 소리 높여 외쳤다.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엘덴이 곧 죽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엘덴이 토르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그냥 내버려두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지만 도저히 돕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만약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엘덴은 절대 도우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토르가 죽는걸 흡족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토르는 아니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외쳐대고 있었다. 더군다나 눈앞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데도 말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변화가 느껴졌다. 마치 몸이 새로운 존재, 혹은 신비한 기운에 의해 조종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불안감이 엄습했음에도 이미 몸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성을 잃은 걸까? 과민반응일까? 이것도 결국 꿈일까? 차라리 되돌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토르는 계속해서 달렸다. 전속력으로 질주했고 두려움이나 의심 따위에 꺾이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뛰었다.

토르는 방향을 바꿔 상체를 숙였다. 뭔가를 발견한 것 같아 가던 길을 멈췄다. 선 채로 가쁜 숨을 골랐다. 방금 본 장면을 이해하려 했지만 설명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단련된 전사라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서 있는 엘덴이 보였다. 단검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들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끔찍했다. 엘덴과 토르의 머리 위로 우뚝 서있는 생물체는 남자 네 명과 맞먹을듯한 너비에 키는 족히 3미터는 돼 보였다. 정체 모를 괴물은 근육으로 뭉친 붉은색 팔을 들여 올렸다. 손에 달린 기다란 손가락 세 개는 손톱처럼 날카로웠고 악마 같은 머리에는 뿔이 네 개나 나있었다. 턱이 길고 이마가 넓었다. 노랗고 큰 두 눈 밑으로 상아처럼 구부러진 송곳니 두 개가 드러났다. 괴물은 몸을 쭉 뻗고 날카롭게 울었다.

토르 옆으로 우거진 수백 년 된 커다란 나무들이 괴물의 울음소리에 힘없이 반으로 갈라졌다.

엘덴은 공포로 얼어 붙었다. 손에 쥔 검마저 떨어트렸고 그가 서있는 땅이 축축해졌다.

괴물은 으르렁 거리며 군침을 흘렸고 엘덴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토르 역시 겁을 잔뜩 먹었다. 그러나 엘덴과 달리 토르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어떤 연유에선지 공포심 덕에 감각이 발달된 것 같았다. 좀더 생동감이 느껴졌고 시야가 좁아져 엘덴을 노리는 괴물의 너비와 폭과 힘과 속도에 최대한 집중 할 수 있었다. 모든 움직임이 감지됐다. 뿐만 아니라 토르 자신의 위치와 토르가 가진 무기에도 더욱 수월히 집중할 수 있었다.

행동에 나선 토르는 괴물과 엘덴 사이로 돌진했다. 괴물이 포효하자 멀리서도 그 뜨거운 입김이 전해졌다. 무시무시한 소리에 토르의 머리털이 바짝 섰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에레크 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해지거라. 두려움을 버리고 평정을 유지하거라. 토르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손에 쥔 검을 높게 들고 달려들어 괴물의 가슴에 깊이 박았다. 심장 이길 바랬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괴물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와 토르의 손을 타고 흘렀다. 토르는 멈추지 않고 칼자루만 남을 때까지 검을 더 깊게 꽂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괴물은 죽지 않았다.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괴물은 몸을 휘둘러 토르의 갈비뼈를 강타했다. 엄청난 타격에 토르의 갈비뼈가 모두 부서졌다. 토르는 그대로 날아가 나무에 부딪힌 뒤 바닥에 떨어졌다.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머리에 전해오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토르는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하고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괴물은 몸을 수그려 몸에 박힌 검을 뽑았다. 커다란 괴물 손에 들린 검이 이쑤시개마냥 초라해 보였다. 괴물 손에 던져진 검은 나무 뒤로 날아가 숲 속에 자취를 감췄다.

괴물의 모든 관심이 이제 토르에게 쏠렸고 토르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엘덴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괴물의 공격대상이 토르로 바뀌자 엘덴도 행동에 나섰다. 엘덴은 괴물 뒤로 달려가 등에 올라탔다. 덕분에 괴물이 주춤했고 그 사이 토르는 몸을 일으켰다. 광분한 괴물은 팔을 뒤로 흔들어 엘덴을 던져버렸다. 엘덴은 속수무책으로 날아가 나무에 부딪혀 그대로 쿵 하며 땅에 떨어졌다.

괴물은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고, 격한 숨소리와 함께 다시 토르에게 주의를 돌렸다. 으르렁대며 토르에게 접근하는 괴물이 입을 벌리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사라졌고 괴물과 토르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괴물이 토르를 덮쳤지만 몸을 굴려 빠져 나와 찰나의 순간에 위기를 면했다. 괴물의 손이 그대로 토르가 있었던 나무 위를 덮쳤고 그 힘이 얼마나 센지 나무가 뽑혀버렸다.

괴물은 토르를 밟아버릴 기세로 발을 높이 쳐들었다. 토르는 몸을 굴려 다시 한번 위기를 피했고 토르가 머물던 자리에는 괴물의 발자국이 땅 속 깊숙이 패여 있었다.

토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새총에 돌을 넣고 던졌다.

괴물의 눈과 눈 사이를 정면으로 조준했다. 그 어느 때보다 있는 힘껏 돌을 날렸고 돌에 맞은 괴물이 뒤로 비틀거렸다. 분명 죽었을 거라 확신했다.

놀랍게도 괴물은 멈추지 않고 토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토르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자신이 가진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소환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곤 괴물에게 돌진해 뛰어올랐다. 그가 가진 초인적인 힘으로 괴물에게 달려들어 괴물을 제압하고 땅에 내려꽂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토르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지 않았다. 여전히 토르는 평범한 한 소년일 뿐이었다. 무지막지한 괴물 앞에 선 나약한 소년일 뿐이었다.

괴물이 토르의 허리를 잡아 공중에 들어올려 토르는 속수무책으로 거꾸로 매달렸다. 이내 괴물이 토르를 던져버렸고 화살처럼 날아간 토르는 나무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대로 누워 실신한 토르의 두개골과 갈비뼈가 모두 부서졌다. 괴물은 다시 토르를 향해 달려들었고 토르도 이젠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는 걸 예감했다. 괴물은 근육이 울퉁불퉁한 붉은 발을 올려 들었다. 토르의 머리를 밟을 모양새였다. 토르는 마음속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괴물이 공중에서 미동도 없이 얼어붙어버렸다. 토르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괴물이 몸을 위로하고 목을 움켜쥐었다. 순간 괴물의 목에서 튀어나온 화살촉이 보였다. 잠시 후 괴물은 무릎을 꿇고 쓰러졌고, 숨을 거뒀다.

에레크 명장이 달려와 토르를 살폈다. 그의 뒤로 리스 왕자와 오코너가 달려왔다. 자신을 쳐다보는 에레크 명장이 눈 앞에 아른거렸고 괜찮은지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이 감겼고 세상이 모두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제 18장

천천히 눈을 떴다. 현기증이 밀려왔고 전혀 낯선 곳이었다. 토르는 짚을 채운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아무래도 막사로 돌아온 거 같았다. 부대원들을 보기 위해 팔꿈치를 짚어 상체를 들었다.

그런데 막상 몸을 일으켜 보니 막사가 아니었다. 매우 정교하게 돌로 마감된 침실이었다. 왕실 침실이 분명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북적 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무슨 소린지 생각하던 찰나 커다란 참나무 문이 열렸고 리스 왕자가 점잖게 걸어 들어왔다.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손으로 머리를 눌러 끔찍한 두통을 멈추려고 애썼다.

“어서 일어나, 가자. 모두들 기다리고 있어.”

왕자가 토르를 이끌며 재촉했다.

“잠시만요, 잠깐.”

토르가 몸을 추슬렀다.

“여긴 어디죠? 어떻게 된 거죠?”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잖아. 그리고 넌 곧 오늘의 영웅으로서 축하인사를 받게 될 거야!”

두 사람은 문으로 걸어갔다.

“영웅? 무슨 말이에요? 그리고……제가 여긴 어떻게 왔죠?”

“그 괴물 때문에 네가 기절해버렸어. 오랫동안 정신을 잃었고. 우리가 다같이 기절한 너를 들고 캐니언 협곡 다리를 건넜지. 정말 극적이었어. 그런 몰골로 다시 왕국에 돌아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왕자가 웃었다.

두 사람은 궁전 복도로 걸어나갔다. 걸어가는 내내 남자, 여자, 부대원, 병사, 실버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토르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에서 전에 없던 경외심 같은 게 느껴졌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시선이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눈에 토르를 향한 경멸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토르를 향한 차별적인 시선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토르는 기억을 더듬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숲으로 달려간 건 기억나요. 괴물이랑 싸운 것도. 그리고 나서……”

“네가 엘덴의 목숨을 구해줬잖아. 넌 용감하게 숲 속으로 달려들어갔어, 그것도 혼자서. 왜 그런 건방진 녀석을 위해 그렇게까지 했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넌 그렇게 했어. 폐하께서 네 행동에 매우 흡족해하셔. 엘덴을 구해서가 아니라 네 용기에 감탄하셨어. 폐하께서 축하하길 원하셔. 이런 일은 모두에게 귀감이 되도록 축하해야 한다고 생각하셔. 그래야 폐하도, 왕의 부대도 체면이 서거든. 또 이를 기념하길 원하셔. 폐하께서 네게 상을 내리실 거야. 그래서 네가 지금 여기 있는 거고.”

“제게 상을요? 그렇지만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엘덴을 구했잖아.”

“그냥 한 거에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 그래서 폐하께서 네게 상을 내리시려는 거야.”

그저 난처할 뿐이었다. 토르가 한 행동이 보상을 받을만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찌됐든, 에레크 명장이 아니었다면 토르는 죽은 목숨이었다. 다시 한번 에레크 명장에게 더없이 감사했다. 토르는 언젠가 그 은혜를 보답할 기회가 주어지기만을 바랬다.

“그렇지만 우리 순찰 임무는요? 다 끝내지도 못했잖아요.”

리스 왕자는 토르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안심시켰다.

“친구여, 자넨 한 소년의 생명을 구했다네. 그것도 왕의 부대 부대원을. 그보다 순찰 업무가 중요하진 않지. 무탈한 첫 순찰 임무 치고는 엄청난 일을 했지!”

왕자가 웃었다.

또 다른 복도 끝에 다다르자 문 앞에 서있던 두 명의 병사가 토르와 리스 왕자에게 문을 열어줬다. 들어가 보니 넓은 궁실이었다. 넓은 공간에는 약 백 맹 정도 되는 전사들이 서 있었다. 대성당을 연상케 하는 높은 천장과 형형색색 물들인 창문 밑으로 각종 무기들과 갑옷이 마치 트로피처럼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전사의 전당이었다. 가장 뛰어난 전사들, 실버들이 회동을 갖는 장소였다. 토르는 벽에 진열된 명성 높은 무기들과 전설로 전해지는 영웅들의 갑옷에 시선이 빼앗겼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사의 전당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다. 행여라도 이 곳에 와볼 수 있으려나 늘 꿈꿔 왔었다. 이곳은 부대원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었다. 오직 실버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더욱 놀랍게도 토르가 방에 들어서자 전당 안에 있던 모든 실버들이 몸을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그들은 토르에게 경외심을 표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전사들을 한곳에서 보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의 인정을 받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꿈속에 있었는데 말이다.

리스 왕자가 어안이 벙벙해진 토르의 표정을 살폈다.

“최정예 실버 대원들이 너를 예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거야.”

기분이 우쭐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를 예우하러요? 그렇지만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아니란다.”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에레크 명장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토르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넌 용감함과 명예로움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눈 앞에 위험을 감수하고서. 넌 동지를 구하기 위해 네 목숨까지 바치려 했다. 그게 바로 왕의 부대가 추구하는 정신이자 실버로서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지.”

“명장님이야 말로 제 목숨을 구해 주셨어요. 명장님이 아니셨으면 전 그 괴물한테 죽었을 거예요. 어떻게 감사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명장을 활짝 웃었다.

“벌써 했단다. 마상경기 기억 나지? 이제 우리 서로 빚을 갚았구나.”

토르는 전당의 제일 안쪽에 위치한 맥길 왕의 왕좌로 걸어갔다. 양쪽으로 리스 왕자와 에레크 명장이 나란히 걸었다. 수백 명의 이목이 토르에 집중됐고 꿈인지 생신지 알 수 없었다.

왕의 뒤에는 수십 명의 자문단이 서있었다. 그곳에는 왕의 첫째 아들, 캔드릭 왕자도 보였다. 토르는 왕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스스로 긍지를 느꼈다. 맥길 왕이 또다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토르와 대면한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각종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증인이 되어주고 있었다.

왕좌 앞에 걸음을 멈췄다. 맥길 왕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전당 안이 고요해졌다. 위엄에 잠겨 있던 맥길 왕이 미소를 지으며 세 걸음 앞으로 다가가 놀랍게도 토르를 끌어안았다.

전당 가득 환호성이 울렸다.

포옹 후 왕은 다시 토르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미소를 지으며 토르를 내려다봤다.

“자네가 부대원으로써 훌륭한 일을 해줬네.”

시중 하나가 왕에게 술잔을 올렸고 왕은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곧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용기를 위해!”

“용기를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왕을 따라 외쳤다. 기분 좋은 웅성거림이 퍼져나간 뒤 이내 전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네가 세운 위업을 기리기 위해, 네게 큰 상을 하사하겠다.”

왕의 신호에 신하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길고 검은 장갑을 착용한 신하의 손 위로는 어마어마한 몸짓의 매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매는 몸을 돌려 토르를 주시했다. 마치 익숙한 사람을 보고 있는 표정이었다.

토르는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어젯밤 꿈에서 봤던 은빛에 검은 줄이 이마에 드리워진 그 매였다.

“매는 우리 왕국과 왕족의 상징이다.”

왕이 설명했다.

“이 맹금은 자부심과 명예를 뜻한다. 또한 기량과 기묘함을 갖추고 있다. 충성심이 강하고 사나우며 모든 짐승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을 비행한다. 이 새는 영물이다. 이 새의 주인이 된 자는 반대로 이 새를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 앞으로 네 모든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네게서 멀리 날아가겠지만 언제든지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이 시간 이후로 이 매는 너를 주인으로 섬길 것이다.”

매를 든 신하가 앞으로 나와 토르의 손과 팔목에 무거운 장갑을 씌어준 뒤 매를 토르에게 넘겨줬다. 팔 위에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매의 무게에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토르는 팔에 힘을 잔뜩 주며 있는 힘껏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매는 매대로 토르의 팔목 위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매가 발톱에 힘을 주며 토르의 손목 위를 파고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장갑 덕에 토르에게는 그 힘만 전해졌다. 매가 몸을 돌려 토르와 눈을 맞추고 날카롭게 울었다. 매와 눈이 마주치자 알 수 없는 신비한 교감을 느꼈다. 순간 매와 토르가 영원히 서로에게 종속된 관계임을 감지했다.

“뭐라고 이름을 지어줄 것인가?”

왕이 물으며 정숙한 전당의 침묵을 깼다.

토르는 골똘히 생각해봤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빨리 결정해야 했기에 알고 있는 모든 명예로운 전사의 이름을 떠올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벽에 진열된 장식 판들을 둘러봤다. 나열된 장식 판에는 전사의 이름과 왕국의 지명들이 나열돼 있었다. 지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번도 가본적은 없지만 신비하고 강렬한 곳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매와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에스토펠레스라고 부를 거에요.”

“에스토펠레스!”

숨죽여 바라보던 사람들이 동의하는 듯 따라 외쳤다.

순간 매가 날카롭게 울며 토르가 지어준 이름에 대답했다.

에스토펠레스는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아올랐다. 천정의 정점까지 올라가더니 창문 밖으로 날아가버렸다. 토르는 에스토펠레스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걱정 마세요, 언제든지 필요할 때 곁으로 올 겁니다.”

매를 건넨 신하가 말했다.

토르는 몸을 돌려 왕을 바라봤다. 토르는 지금껏 선물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상당한 위상을 가진 선물은 더더욱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토르는 어쩔 줄을 몰랐다.

“폐하.”

토르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말을 전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했네.”

사람들이 환호했고 전당 내 가득했던 긴장이 사라졌다. 사람들 사이로 생생한 대화가 흘렀고 수 많은 전사들이 토르에게 다가왔다. 어디를 봐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이분은 동부지방 출신 알고드 전사야.”

리스 왕자가 토르에게 알고드 전사를 소개했다.

“이분은 로우 마쉬즈 출신 카메라 전사…… 그리고 이분은, 바식홀드, 북폴츠에서 오셨어……”

점차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생에 처음으로 인정받는 영예로운 순간이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난생 처음으로 스스로가 대단히 가치 있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에스토펠레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리저리 돌아가며 기억도 못할 이름들을 듣고 전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가 전사들 사이를 헤치고 토르에게 다가왔다. 그는 토르의 손바닥에 조그맣게 돌돌 말린 쪽지 하나를 건네고 사라졌다.

토르는 쪽지를 펴서 우아한 필체의 손 글씨를 읽었다.

왕실 뒤뜰에서 만나. 성문 뒤에서.

분홍색 쪽지에서 우아한 향이 전해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토르는 쪽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고민했다. 쪽지에는 이름도 적혀있지 않았다.

리스 왕자가 몸을 기울여 어깨너머로 쪽지를 읽곤 웃어버렸다.

“보아하니 누나가 네게 관심이 있나 봐.”

왕자가 미소를 가득 보이며 말했다.

“나라면 당장 갈 거야. 누나는 기다리는 거 싫어하거든.”

얼굴에서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뒤뜰로 가려면 이쪽에 있는 문들을 모두 지나야 해. 서둘러. 누나는 금방 마음이 바뀐단 말이야.” 왕자는 토르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네가 내 매형이 된다면 난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야.”

제 19장

토르는 사람들로 북적 이는 궁전에서 리스 왕자가 알려준 대로 길을 찾아갔다. 그러나 알려준 대로 따라가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궁전은 미로같이 복잡했고 매 공간마다 여러 길이 이어졌다. 뒷문이 너무 많았고 복도는 너무 길었고 복도의 끝에는 또 다른 복도가 있었다.

왕자가 알려준 순서를 대뇌이며 작은 계단을 내려가 또 하나의 복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제서야 리스왕자가 말한 빨간 손잡이가 달린 작은 원형 문이 눈에 들어왔다. 토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서두르며 문밖을 나섰더니 한여름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 볕에 눈이 부셨다. 야외로 나오니 마음이 들떴다. 답답한 궁전 밖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햇살을 쬈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저절로 실눈이 떠졌고 서서히 빛에 적응했다. 토르의 눈앞에 왕실 정원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울타리는 다양한 모양으로 빈틈없이 손질돼 단정하게 늘어섰고 그 사이로 산책로가 구불구불 이어졌다. 곳곳에 분수가 보였고 특이한 나무들도 가득했다. 이른 여름 과일들이 유실수마다 주렁주렁 열렸고 들판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웬돌린 공주의 흔적을 찾아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뒤뜰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원 밖으로 아주 높게 담을 쌓아 공간을 분리해 논 걸 보니 아무래도 왕족만이 출입이 가능한 정원 같았다. 쉬지 않고 둘러 봤지만 공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쪽지가 가짜가 아닌가 의심했다. 아마 그럴 확률이 높았다. 감히 공주님 같은 분이 토르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게 가당하기나 하단 말인가?

고개를 숙여 다시 쪽지를 읽었다. 그러나 토르는 수치심에 쪽지를 이내 말아 넣었다. 놀림을 당한 게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공주와 다시 만날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너무 속이 상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로 돌았다. 궁으로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궁으로 이어지는 문을 막 열려던 순간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어딜 가는 거야?”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새가 지저귀는 것만 같았다.

혹시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의심했다. 뒤를 돌아 살펴보니 성벽 아래로 그늘진 곳에 공주가 앉아 있었다. 분홍색으로 장식한 순백의 공단 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고 있었다. 토르가 기억 속에서 꺼내보던 공주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녀가 있었다. 그웬돌린 공주. 첫 만남 이후 계속해서 꿈꿔왔던 소녀. 파랗고 초롱초롱한 눈과 빨간 머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미소의 그녀. 흰색과 분홍색의 창이 큰 모자로 햇빛을 가리고 있었고 모자 아래로 그늘진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토르는 잠시 두리번거리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음……저기……음……잘 모르겠는데……저는……안에 들어가려 했어요.”

토르는 또다시 공주 앞에서 허둥지둥 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생각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게 맘처럼 되질 않았다.

공주가 웃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다.

“왜 그러려고 했는데?”

공주가 장난치듯 물어봤다.

“방금 전에 여기 왔잖아.”

토르는 당황했다. 혀가 마비된 것 같았다.

“공주님을……찾을 수가……없어서요.”

공주가 다시 웃었다.

“나 여기 있잖아. 이쪽으로 와서 내 손 좀 잡아주지 않을래?”

공주가 한 손을 내밀었다. 토르는 서둘러 달려가 몸을 구부리고 공주의 손을 잡아 일어서는걸 도왔다. 부드러운 공주의 살결이 토르의 손에 닿은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공주의 연약한 손이 토르의 손에 꼭 맞게 쥐어졌다. 공주는 고개를 들어 토르와 눈을 맞췄고 잠시 손을 그대로 올려 놓은 뒤 천천히 일어섰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공주의 손끝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이대로 계속 손을 잡고 있길 바랬다.

일어선 공주는 빼낸 손을 다시 토르의 팔에 감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걸었다. 공주는 구불구불하게 연결된 산책로로 토르를 안내했다. 조약돌이 깔린 좁은 길을 따라 걸었고 미로 같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밖의 시선이 차단된 곳이었다.

토르는 긴장했다. 이런 곳에 평민의 신분으로 폐하의 딸과 함께 들어와 곤경에 처해질까 염려됐다. 이마에 가볍게 땀이 맺혔고 느껴지는 따뜻함이 자신의 열기인지 공주의 손길인지 구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왕실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됐지?”

공주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깨준 공주가 고마웠다.

토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죄송해요. 의도한 건 아니에요.”

공주가 웃었다.

“왜 의도한 게 아니야? 관심을 받으면 좋은 거 아니니?”

토르는 좌절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답답했다. 늘 바보 같은 말만 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게 속상했다.

“아무튼, 여기는 너무 답답하고 지루해.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면 참 좋아. 아버지께서도 널 꽤 흡족해하셔. 리스도 그렇고.”

“음……감사해요.”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질책했고 죽을 것만 같았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얘길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공주님께서는……”

토르는 머리를 쥐어짜며 적당한 말을 생각했다.

“……왕궁이 좋으세요?”

공주가 몸을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내가 과연 이곳을 좋아할까? 어쨌든 좋아해야지. 여기가 내 집인걸!”

공주는 다시 한번 웃었고 토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위기를 다 망치고 있는 것만 같아 스스로를 자책했다. 토르는 여자들과 어울려 본 적이 없었고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경험도 없었다. 그저 공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는 소년이었다. 공주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 고향이 어디냐고? 공주의 고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공주가 왜 자기를 불러냈는지 궁금했다. 단지 놀이상대인 것일까?

“왜 저를 좋아하세요?”

순간 공주가 고개를 돌려 토르와 눈을 맞췄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너 주제넘구나.”

공주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

공주는 활짝 웃고 있었다. 토르가 무슨 말을 하건 공주는 확실히 재미있어 했다.

토르는 화를 자초한 것 같았다.

“죄송해요.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궁금했어요. 그러니깐……음……공주님이 절 안 좋아하시는 거 알아요.”

공주가 더욱 크게 웃었다.

“너 정말 재미있구나, 이건 인정해야겠다. 너 한번도 여자친구 사귄 적 없지, 맞아?”

토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피했다.

“누나나 여동생도 없지?”

토르는 다시 끄덕였다.

“형만 셋이에요.”

불쑥 대답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대화의 흐름에 걸맞은 평범한 대답을 했다.

“그래? 형들은 어디 있어? 고향에 있어?”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여기 있어요. 부대에요, 저와 같이.”

“음, 그럼 좀 편하겠네.”

토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형들은 절 싫어해요. 부대에서도 나가길 바래요.”

처음으로 공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왜 널 싫어하는 거니? 네 친 형제들이니?”

토르는 어깨를 들썩였다.

“저도 알고 싶어요.”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걸었다. 혹시라도 즐거운 분위기를 다 망쳐버린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걱정 마세요, 전 신경 안 써요. 늘 그렇게 살았는걸요. 반대로 여기선 정말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어요. 제 생에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에요.”

“내 동생? 리스?”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는 좋은 아이야. 어떤 면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제지. 내겐 형제가 네 명 있어, 너도 알다시피. 세 명은 친형제고, 한 명은 아니야. 첫째 오빠와는 아버지만 같고 어머니는 달라. 반쪽 형제지. 캔드릭 오빠, 너도 알지?”

토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 큰 빚을 졌어요. 제가 부대원이 된 건 다 그분 덕이죠. 참 멋진 분이세요.”

“맞아. 왕국에서 가장 멋진 남자 중 하나야. 나는 캔드릭 오빠를 친형제나 다름없이 좋아해. 그리고 또 리스도 그만큼 좋아. 나머지 오빠 두 명은……글세……너도 가족이 어떤지 알잖아. 모두 다 친하지는 않아. 가끔씩은 우리 형제가 어떻게 같은 부모 밑에서 나왔는지 궁금하기도 해.”

토르는 궁금해졌다. 나머지 두 형제가 누구이며 공주와 그들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지 알 고 싶어졌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것 같이 보일 까봐 걱정됐다. 공주 또한 그 부분에 있어서는 더 이상 언급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공주는 분명 행복한 것을 위주로 생각하는 행복한 사람 이었다.

조약돌이 깔린 길이 끝나자 새로운 정원이 시작됐다. 잔디는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다양한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엄청나게 큰 놀이판이 보였다. 각 방향으로 15미터는 족히 돼 보였고 토르보다 키가 큰 나무 조각들이 세워져 있었다.

공주가 즐겁게 외쳤다.

“이거 해볼까?”

“이게 뭐죠?”

공주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랙 게임 한번도 안 해봤니?”

창피해진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시골 촌뜨기도 이런 촌뜨기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제일 재미있는 게임이야!”

한껏 신이 난 공주가 대답했다.

공주는 두 팔을 뻗어 토르를 끌고 게임 장 안으로 이끌었다. 공주는 내내 즐거워했고 토르는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자제할 수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이 게임장도 아닌, 이 아름다운 공간도 아닌, 공주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감촉 덕에 전율이 흘렀다. 누군가가 자신을 원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공주가 토르와 게임을 하고 싶어했다. 공주가 토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왜 토르 같은 소년에게 관심을 주는 것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공주가? 혹시 여전히 꿈속을 걷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할 뿐이었다.

“그쪽에 서있어, 그 조각 뒤에. 이제 그 조각을 10초 안에 옮겨야 해.”

“옮기다니요?”

“어디로 옮길지 결정해, 서둘러!”

커다란 나무 조각을 드는 순간 엄청난 무게에 깜작 놀랐다. 나무 조각을 들어 몇 걸음 옮긴 뒤 아무 대나 보이는 대로 사각형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공주가 조각 하나를 들어 토르의 나무 조각을 밀어냈다. 토르의 자리에 공주의 조각이 놓였고 토르의 조각은 옆으로 넘어졌다.

공주가 즐거워하며 소리쳤다.

“수를 잘못 계산했어! 내 땅에 말을 세웠잖아! 네가 졌어!”

영문을 모르는 토르는 땅 위에 놓인 두 개의 조각을 바라봤다. 무슨 게임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공주가 웃으며 다가와 토르의 팔짱을 끼고 산책로로 이끌었다.

“걱정 마, 나중에 가르쳐줄게.”

‘공주님께서 내게 가르쳐주신다니.’ 듣는 순간 토르의 심장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공주는 토르를 다시 보고 싶어 했다. 토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길 원했다. 설마 토르가 여전히 꿈을 꾸는 것인가?

“말해봐, 여기 어떤 거 같니?”

공주는 토르를 또 다른 미로로 안내했다. 미로는 키가 2미터가 훌쩍 넘는 갖가지 꽃들로 장식됐다. 꽃잎들 위로 낯선 곤충들이 배회했다.

“제가 본 곳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에요,”

토르는 진심을 얘기했다.

“근데 왜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되고 싶어 한 거니?”

“늘 제가 꿈꿔왔던 일이에요.”

“그렇지만 왜? 폐하께 충성을 바치고 싶어서?”

토르는 생각에 잠겼다. 한번도 자신의 꿈에 이유를 찾은 적이 없었다. 그냥 그것만이 토르가 원했던 것이었다.

“네, 폐하께 충성하려고요. 링 대륙에도요.”

“그렇지만 네 인생은? 가족을 꾸리고 싶지 않니? 땅은? 부인은?”

공주는 걸음을 멈춰 토르를 바라봤고 덕분에 토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진맥진했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기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토르를 바라보는 공주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어……저는……. 잘 모르겠어요.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걸요.”

“그럼 네 어머니께서는 뭐라고 하셨는데?”

공주의 말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순간 토르의 입가에 머물던 웃음이 생기를 잃었다.

“전 어머니가 없어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토르는 공주에게 모든 것을 말하려 했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 얘기를 처음으로 나눈 사람이 공주가 된다. 이상하게도 공주에게는 말하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걸 다 애기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심어둔 감정까지 공주가 알아주길 바랬다.

이제 막 설명을 하기 위해 입을 뗀 순간, 어디선가 엄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웬돌린!”

날카로운 부름이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왕비가 있었다. 아름답게 차려 입은 왕비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공주에게 다가갔다. 왕비의 얼굴이 창백했다.

왕비는 공주의 팔을 세게 움켜잡고 왕비의 옆으로 끌어당겼다.

“당장 궁전으로 들어가. 내가 한말 잊었니? 저 아이와 다신 말하지 않길 바란다. 알겠니?”

공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놔주세요!”

공주가 왕비에게 애원했으나 소용 없었다. 왕비는 멈추지 않고 공주를 끌고 갔고 왕비의 시녀들도 공주에게 달라붙어 공주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놔달라고요!”

공주가 소리쳤다. 공주는 고개를 돌려 토르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서 필사적이고 슬픈 애원이 느껴졌다.

토르도 같은 심경이었기에 공주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공주를 부르고 싶었다. 끌려가는 공주를 바라보는 내내 가슴이 무너졌다. 눈 앞에서 자신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공주가 사라진 뒤에도 토르는 그 자리에 옴짝달싹 않고 서있었다. 공주가 떠난 곳을 주시하며 숨도 쉬지 않았다.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공주와의 일을 마음속에 평생토록 간직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공주를 다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

다시 궁궐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공주와의 만남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주변의 다른 풍경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공주에 대한 생각으로 넋이 나가 있었다. 토르는 공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공주는 토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예쁘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재미있는 소녀임이 분명했다. 다시 공주를 만나야만 했다. 공주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웠다. 공주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이제서야 겨우 공주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어느새 공주가 없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공주를 끌고 가던 왕비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공주와 토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강력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어떠한 연유에선지 토르와 공주가 함께하는 걸 방해하는 세력이 건실히 존재했다.

그 원인을 찾으려고 고민하던 찰라, 갑자기 가슴에 뻣뻣한 손길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토르의 앞을 막았다.

앞을 보니 토르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소년이 서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몸에 토르는 구경도 못해본 값비싼 옷을 걸치고 있었다. 왕족을 상징하는 보라색과 초록색, 진홍색이 어우러진 비단옷이었다. 머리에는 우아한 깃털이 장식된 모자를 쓰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티가 흘렀다. 편하고 사치스럽게 살아온 삶이 버릇없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고생이라곤 모른다는 부드러운 손으로 토르를 막아 서서 하늘 높이 눈썹을 치켜 뜨고 경멸하듯 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날 알톤이라고 불러. 내 아버지가 바로 폐하의 사촌이신 알톤 경이셔. 700년 동안 내려온 귀족 가문이야. 그 말인즉슨, 내가 바로 공작이라는 거지. 반대로 넌 평민이고.”

알톤은 멋대로 말을 내뱉었다.

“왕실 정원은 왕족만을 위한 곳이야. 적어도 그에 버금가는 지휘를 갖은 사람들이나. 너 같은 부류가 오는 곳이 아니야.”

도대체 이 소년이 누군지, 왜 자신을 화나게 만드는지 토르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죠?”

알톤은 토르를 얕보며 낄낄거렸다.

“역시, 네가 뭘 알겠어. 아마도 넌 아무것도 모를 거야. 안 그래? 감히 네가 뭔데 여길 멋대로 들어와서 왕족인척 하는 거야!”

“왕족인척 한적 없어요.”

“아무튼, 네가 왕궁에 얼마나 큰 돌풍일 일으켰는지는 관심 없어. 네가 혼자 꿈에 부풀기 전에 미리 경고하나 하겠는데, 그웬돌린 공주는 내 꺼야.”

놀란 토르는 알톤을 바라봤다. ‘내 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결혼하기로 정해졌어.”

알톤이 계속 설명했다.

“우리는 동갑에다가 신분도 동등해. 벌써 우리 결혼은 이미 진행 중이야. 그러니까 공주를 넘보기만 해봐. 일초라도 꿈도 꾸지마. 변하는 건 없으니까.”

마치 강풍에 맞아 쓰러진 기분이었다. 뭐라 대꾸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난 공주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도 이해해주고 있어. 공주는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아. 때때로 공주는 평민들이나 시중들에게 인정을 베풀지. 그저 가벼운 친구로 만나주는 거야. 재미 삼아. 혹시 너도 공주의 친절을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지만 딱 거기 까지야. 너는 그저 공주의 새로운 놀이대상이야. 또 다른 오락거리. 마치 인형 수집하듯 모으는 거야. 공주는 그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면 흥미를 갖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지나면 지겨워해. 금새 싫증 내거든. 넌 공주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어. 더군다나 올해 말이 되면 공주는 내 아내가 되어 있을 거야. 영원히.”

치열한 의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알톤을 눈을 크게 부릅떴다.

알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토르의 가슴에 박혔다. 사실일까? 토르는 정말 공주에게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일까? 혼란스러웠다. 무얼 믿어야 할지 괴로웠다. 공주는 진실해 보였다. 어쩜 이건 모두 토르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걸까?

“거짓말이야.”

토르가 결국 되받아 쳤다.

알톤이 비웃었다. 그는 곱디고운 손가락 하나를 올려 토르의 가슴을 찔렀다.

“만약 여기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게 다시 한번 내 눈에 띈다면 내 권한으로 왕실 병사를 부를 거야. 그럼 넌 수감될 거야!”

“뭘 근거로요?!”

“내겐 근거 따윈 필요 없어. 내 신분이면 충분해. 죄명이야 하나 지어내면 되고. 내가 말하면 모두들 믿을 거야. 내 모략에 왕국 절반은 모두 너를 죄인으로 여길 거야.”

알톤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역겨웠다.

“명예롭지 못하군요.”

토르는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알톤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알톤은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웃어댔다.

“난 명예 따윈 안 키워. 명예는 바보들이나 중요시하지. 난 내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돼. 너나 명예에 목숨 걸어. 그리고 그웬돌린 공주는 내 차지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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