Бесплатно

전사로의 원정

Текст
Из серии: 마법사의 링 #1
iOSAndroidWindows Phone
Куда отправить ссылку на приложение?
Не закрывайте это окно, пока не введёте код в мобильном устройстве
ПовторитьСсылка отправлена
Отметить прочитанной
Шрифт:Меньше АаБольше Аа

제 22장

리스 왕자가 선술집의 문을 열자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르는 셔츠 속에 크론을 품었다. 선술집 내부는 미리 도착한 부대원들과 실버 대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토르 일행이 나타나자 다들 소리치며 인사를 건넸다. 빽빽한 술집에 들어서니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토르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부대원들과 어깨를 맞댔다. 긴 사냥을 마친 하루였다. 사냥에 참가한 이들은 모두 이곳 숲 속 깊숙이 자리한 선술집에 모여 축배를 들었다. 실버 대원이 자리를 안내했고 토르 일행은 그를 따라갔다.

쌍둥이 형제 콘발과 콘벤이 남들보다 몇 배는 큰 이들의 전리품, 멧돼지를 메달은 긴 막대기를 나란히 이고 토르 뒤를 쫓아갔다. 전리품은 반입이 금지되어 쌍둥이들은 술집 문 앞에 전리품을 내려놨다. 토르는 사냥한 멧돼지에 마지막 눈길을 줬다. 여전히 사나워 보였고 그런 멧돼지를 사냥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옷 속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크론을 살펴봤다. 백 표범 새끼를 품 안에 품고 있다니,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크론은 투명한 파란 눈으로 토르를 보며 징징거렸다. 배가 고파 보였다.

토르의 뒤로 수십 명도 더 되는 인원이 술집에 발을 디딘 까닭에 토르는 거의 떠밀리다시피 선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술집 깊숙이 걸어갔고 술집의 좁고 북적거리는 공간은 밖과 비교해 족히 20도는 더 높은 것 같았다. 그만큼 끈끈함도 더했다. 토르 앞으로 에레크 명장과 캔드릭 왕자가 걸어갔고 뒤로는 리스왕자, 엘덴, 쌍둥이 형제, 오코너가 일렬로 따라왔다. 오코너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다행히 출혈이 멈춘 후였다. 다시 긍정적인 모습을 회복한 오코너는 상처에 아파하기는커녕 벌써부터 술집에 마음이 뺏겨있었다. 일행은 술집 안쪽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움직일 때마다 서로 어깨가 부딪혔고 술집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 덕에 몸을 돌릴 공간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다. 몇몇 사람들이 기다란 벤치 위에 올라서서 앉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고, 잔과 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하거나 일부러 테이블 위로 잔을 내리쳐 쾅 소리를 냈다. 토르로써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소란스러운 축제 분위기였다.

“술집 처음 온 거지?”

토르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엘덴이 소리쳤다.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시골 촌뜨기가 따로 없었다.

“그럼 잔 맥주도 한번도 못 마셔 봤겠네, 그렇지?”

콘벤이 웃으며 토르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당연히 마셔봤지.”

토르는 변명하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토르의 얼굴이 달아올랐고 제발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길 바랬다. 사실 토르는 제대로 술을 마셔본 경험이 없었고 고작해야 첫째 공주의 결혼식 축제 때 조금 마셔본 게 전부였다. 토르의 아버지는 음주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행여 허락했다 할지라도 술을 살 돈이 없었기에 역시나 마셔보지 못했을 것이다.

“듣던 중 반기운 소리! 바텐더, 우리 가장 센 걸로 한잔씩 돌려줘. 여기 토르 이 친구가 술을 꽤 하거든!”

콘발이 소리쳤다.

쌍둥이 중 하나가 금화 한 닢을 꺼내 내려놨다. 쌍둥이들이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은 건지 놀라울 뿐이었다. 어느 집 출신인지도 궁금했다. 저 정도 돈이면 토르의 고향에선 식구들 한달 생활비였다.

잠시 후 거품이 가득한 맥주 열 두 잔이 바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쌍둥이들이 인파를 헤집고 다가가 술잔을 들고 왔다. 토르의 손에도 잔이 하나 쥐어졌다. 거품이 넘쳐 토르의 손가락 위로 흘러내렸다. 기대감에 벌써부터 토르의 배가 꼬르륵거렸다. 긴장도 살짝 됐다.

“사냥을 위하여!”

리스 왕자가 목청껏 외쳤다.

“사냥을 위하여!”

나머지 일행들이 따라 외쳤다.

토르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맥주잔을 입으로 옮기며 나머지 일행들을 따라 했다. 한 모금 넘겨보니 영 내키지 않는 맛이었다. 그러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술잔을 비우는 일행들의 모습을 보고선 겁쟁이로 보일까 두려워 의무감으로 술을 마셨다.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억지로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난데없이 나오는 기침 세례에 반 정도 남긴 술잔을 내려 놀 수밖에 없었다.

토르에게 시선이 쏠린 일행들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엘덴은 토르의 등을 살짝 쳤다.

“맥주 처음 마시는 거지, 그렇지?”

토르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에 남은 거품을 닦아냈다. 엘덴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순간 마침 어딘가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다같이 돌아보니 악단 명 몇이 입장해 류트와 플루트, 심벌즈를 연주했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고조됐다.

“동생아!”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토르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아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허리는 가늘었지만 어깨는 떡 벌어진 체격이었다. 면도도 안 한 데다 차림새도 단정하지 못했다. 남자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리스 왕자에게 어색한 포옹을 건넸다. 남자의 뒤로 역시나 단정하지 않아 보이는 세 명의 일행이 있었다.

“이런 데서 널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걸!”

남자가 리스 왕자에게 말을 건넸다.

“글쎄, 그래도 아주 가끔씩은 형을 본받아야 할 때도 있어야지, 안 그래?”

리스 왕자가 웃으며 소리쳤다.

“토르, 내 형 고드프리 왕자, 알지?”

고드프리 왕자는 몸을 돌려 토르에게 악수를 건넸다. 고드프리 왕자의 손은 부드러웠고 푹신했다. 전사와는 거리가 먼 손이었다.

“물론 새로 등장한 인물에 대해 익히 들었지.”

고드프리 왕자가 토르에게 몸을 바짝 기댔고 혀가 꼬인 채로 계속 말을 건넸다.

“왕국 전체가 네 얘기로 떠들썩해. 아주 훌륭한 전사라며.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술집이 귀한 예비손님을 잃었어!”

고드프리 왕자는 몸을 뒤로 젖히고 정신 없이 웃어댔다. 왕자의 일행도 함께 웃었다. 일행 중 가장 크고 배가 나온 남자가 취기가 잔뜩 오른 얼굴로 토르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용맹함은 훌륭한 기질이야. 그렇지만 그로 인해 전장에 나가고 추위에 시달리지. 술꾼이 된다는 건 이보다 훨씬 더 훌륭하지. 안전과 온기를 보장해주거든. 더군다나 포근한 여자들도 언제나 곁에 둘 수 있다고!”

말을 마친 남자는 일행들과 미친 듯이 웃어댔다. 어느새 바텐더가 맥주잔을 새로 채웠고 이를 본 토르는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길 바랬다. 벌써 머릿속에 취기가 가득했다.

“토르는 오늘이 첫 사냥이었어!”

리스 왕자가 고드프리 왕자에게 외쳤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술을 한 잔 마셔야겠네, 그렇지?”

“두 잔은 마셔야지!”

고드프리 왕자의 일행이 덧붙였다.

토르의 손에 잔이 하나 새로 쥐어졌고 토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을 위해!”

고드프리가 소리쳤다.

“처음을 위해!”

나머지 일행들이 따라 외쳤다.

“살면서 수 많은 첫경험을 하길 바란다. 대신 술이 깨는 첫경험만은 영원히 없었으면 해!”

키 큰 남자가 외쳤다.

모두가 술을 마시며 혼을 잃고 웃어댔다.

토르는 한 모금 마신 뒤 술잔을 내려놨다. 고드프리 왕자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술을 그렇게 마시면 안 돼지!”

고드프리 왕자가 소리치며 앞으로 다가와 술잔을 집어 토르의 입에 들이댔다. 마지못해 술을 마시는 토르의 모습에 일행들은 웃어댔다. 잔을 깨끗하게 비워 탁자에 내려놓자 환호성이 들렸다.

토르는 어렴풋이 밀려오는 현기증을 느꼈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고 집중력도 흐릿해졌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품 안에서 꿈틀거림이 느껴지더니 어느새 크론이 고개를 빼 들었다.

“아니 이것 좀 봐봐!”

고드프리 왕자가 즐거운 듯 소리쳤다.

“새끼 표범이에요.”

토르가 설명했다.

“사냥하다가 발견했어.”

리스 왕자가 덧붙였다.

“배가 고플 거에요. 근데 뭘 먹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왜 몰라? 맥주를 줘야지!”

키 큰 남자가 외쳤다.

“진짜요? 건강에 좋을까요?”

“물론이지! 홉으로 만든 거라고!”

이번에는 고드프리 왕자가 대답했다.

고드프리 왕자가 손가락에 맥주를 찍어 크론에게 가까이 대자 크론은 앞으로 몸을 빼고 손가락을 핥았다. 그러더니 쉬지 않고 왕자의 손가락을 핥고 또 핥았다.

“봐봐, 좋아하잖아!”

순간 고드프리 왕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을 움츠렸다. 왕자는 손가락을 높이 들어 피를 보여줬다.

“이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모르겠군!”

고드프리 왕자가 소리치자 일행들이 웃어댔다.

토르는 몸을 숙여 크론의 머리를 쓰다듬고 술잔을 입가에 기울여줬다. 크론은 남은 맥주를 전부 핥아 먹었다. 토르는 크론이 먹을만한 제대로 된 먹을 거리를 찾아봤다. 막사 내에서 크론을 키우려면 콜크 사령관의 허락이 절실했다. 나머지 부대원도 반대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악사들이 새로운 곡을 연주했고 고드프리 왕자의 친구들이 몇 명 더 나타났다. 이들은 토르 일행에게 다가와 맥주를 한잔씩 돌려 마시고선 고드프리 왕자와 함께 북적대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보자고, 동생.”

고드프리 왕자가 자리를 떠나며 리스 왕자에게 외쳤다. 그리곤 토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바라건대 술집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길!”

“바라건대 전장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길!”

캔드릭 왕자가 대꾸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고드프리 왕자는 이 말을 남기고 일행들과 정신 없이 웃으며 사라졌다.

“항상 이렇게 술을 마시나요?”

토르가 리스 왕자에게 물었다.

“고드프리 형? 아마 걸음마 떼고 나서부터 술집 출입 했을 거야. 아버지의 가장 큰 근심거리지. 그렇지만 형은 스스로 만족하고 즐거워해.”

“아니요, 제 말은 병사들 말이에요. 왕의 부대요. 늘 이렇게 선술집에 모이나요?”

리스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서 그래. 첫 사냥이었고, 낮이 가장 긴 하지잖아. 흔치 않은 일이지. 그러니까 즐겨둬.”

술집을 둘러보면 볼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토르가 원하는 건 이런 술집 출입이 아니었다. 막사로 돌아가 훈련에 매진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다시 그웬돌린 공주에게서 멈췄다.

“그 남자 얼굴 기억하니?”

캔드릭 왕자가 토르에게 다가와 물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토르가 영문을 모른 채 캔드릭 왕자를 쳐다봤다.

“아까 숲 속에서 말이야, 활을 쏜 남자 기억나지?”

캔드릭 왕자가 설명했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다들 가까이 모여 둘의 대화를 들었다.

토르는 다시 한번 기억해봤지만 집중이 불가능했다. 모든 게 흐릿했다.

“저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근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요.”

“어쩌면 폐하의 병사가 실수로 우리 쪽에 할을 쏜걸 거야.”

오코너가 말했다.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옷차림이 달랐어요. 온통 검은색 차림이었어요. 망토도 그렇고 모자까지. 그리고 화살을 딱 한발 만 쐈어요. 캔드릭 왕자님을 향해서요. 그리곤 바로 사라져버렸어요. 죄송해요. 좀 더 봤어야 했는데.”

생각에 잠긴 캔드릭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형이 죽길 바라는 사람이 누구야?”

리스 왕자가 캔드릭 왕자에게 물었다.

“암살 시도였나요?”

오코너가 물었다.

캔드릭 왕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아는 한 내겐 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아버지께서는 적이 많잖아, 아버지께 도전하기 위해 형을 없애려고 한 걸 지도 몰라.”

“어쩌면 왕자님을 없애 왕좌를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수도!”

엘덴이 가정했다.

“하지만 너무 터무니없어! 난 적자가 아니라고! 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해!”

일행 모두가 고개를 저었고 맥주를 홀짝이며 실체 파악을 위해 생각에 잠겼다. 그 무렵 술집에서 고함소리가 들렸고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고정됐다. 올려다보니 여자들이 한 줄로 이층 복도에서 난간으로 걸어 나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아슬아슬하게 옷을 걸쳐 입고 진한 화장을 했다.

토르는 보기만해도 얼굴이 붉어졌다.

“안녕, 남자들!”

제일 앞에 선 여자가 외쳤다. 큰 가슴에 빨간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들이 환호했다.

“오늘밤을 위해 돈 가져온 사람 어디 있나요?”

다시 한번 환호성이 들렸다.

눈앞의 광경에 놀란 토르는 토끼 눈이 됐다.

“여기 사창가였어?”

토르가 물었다.

일행들이 고개를 돌려 말없이 토르를 바라봤다. 그리고선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너 숫총각이구나, 맞지!”

콘발이 말했다.

“너 한번도 사창가 와본 적 없어?”

콘벤이 물었다.

“여자도 한번 제대로 못 만나봤을 걸!”

엘덴이 대꾸했다.

이들의 시선에 토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이들 말대로 토르는 한번도 여자와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절대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혹시 말하지 않았는데도 티가 나지 않을까 걱정됐다.

뭐라도 대답하기도 전에 쌍둥이 형제 한 명이 다가와 토르의 등을 꼭 잡고 계단 위 여자에게 금화를 던졌다.

“여기 첫 번째 손님이요!”

쌍둥이 형제가 외쳤다.

술집 가득히 환호성이 울렸다. 안간힘을 쓰며 몸부림을 쳤는데도 불구하고 토르는 어느새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이끌려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내내 머릿속은 그웬 공주뿐이었다. 얼마나 공주를 마음 깊이 좋아하는지 생각했고, 공주 외의 사람과는 한시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돌아서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었다. 수십 명의 큰 덩치들이 토르를 끌고 갔고 돌아서지 못하게 막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계단을 올라 자신보다 키가 큰 여자 앞 이었다. 여자는 과한 향수냄새를 풍기며 토르를 향해 미소 지었다. 더욱 최악인건, 이미 취해버린 토르였다. 토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여자는 토르에게 다가서서 상의를 벗긴 뒤 토르를 방으로 끌고가 문을 닫았다. 토르는 여자를 거부했다. 그웬 공주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식의 첫경험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무 취해 눈앞이 흐릿했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건 여자의 침대위로 끌려온 기억과 그러는 내내 바닥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쓴 기억뿐이었다.

제 23장

끊임 없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맥길 왕은 억지로 눈을 떴고 순간 단잠을 깬 아쉬움이 밀려왔다. 머리가 찢어질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열려있는 창문위로 내리쬐는 찬란한 햇빛이 잔인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밤새 양피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골아 떨어져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 기억을 더듬어봤다. 왕이 깨어난 곳은 궁전이었다.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사냥을 나섰고 그 후 숲 속 선술집으로 향했다. 무리해서 술을 마셨지만 만취 상태에서도 궁에 잘 찾아 왔다.

왕은 고개를 돌려 왕비를 봤다. 왕 옆자리에서 이불을 덮고 잠이든 왕비는 이제 슬슬 깰 참이었다.

누군가 또다시 문을 두들겼다. 철로 된 고리 쇠가 부딪히며 끔찍한 소음을 자아냈다.

“누가 저렇게 문을 두드리죠?”

신경이 쓰이는 듯 왕비가 물었다.

맥길 왕도 같은 생각이었다. 왕은 분명 신하들에게 잠을 깨우지 말라고 평소 단단히 일렀다. 특히 사냥을 하고 온 날이면 이를 더욱 강조했다. 왕명을 어긴 죄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짐작하건대 집사가 하찮은 재정 문제나 거론하려고 문을 두드리는 게 분명했다.

“감히 누가 이리 소란을 피우냐!”

맥길 왕이 결국 고함을 질렀다. 침대에서 몸을 돌려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왕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나머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는 이내 양 손으로 감지 않은 머리를 쓸었다. 다시 수염과 얼굴을 차례로 쓸어내며 정신을 차렸다. 사냥과 음주의 여파가 너무 컸다. 한창때에 비해 몸이 많이 굳었다. 왕은 세월의 여파와 함께 기력을 모두 소진해버렸다. 지금 이 상태라면 평생토록 금주를 맹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은 있는 힘껏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섰다. 가운만 입은 채 침실을 가로질러 문으로 걸어갔다. 두꺼운 철문고리를 붙잡고 앞으로 당겼다.

문 앞에는 총 사령 고문관, 브롬이 양 옆으로 중위 두 명을 대동하고 서있었다. 중위 두 명은 고개를 숙여 왕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총 사령 고문관은 엄숙한 얼굴로 왕을 바라봤다. 맥길 왕은 늘 브롬의 엄숙한 표정이 내키지 않았다. 이러한 얼굴에는 어김없이 침울한 소식이 함께였다. 맥길 왕은 그럴 때마다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즐거웠다. 즐거웠던 사냥 덕에 철없던 젊은 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선술집에서 시간을 보냈을 땐 더더욱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불청객의 방문에 억지로 잠이 깼고 덕분에 누렸던 평화도 깨져버렸다.

“폐하, 잠을 방해해 죄송합니다.”

브롬이 입을 열었다.

“죄송해야지, 중요한 사안이어야 하네.”

“그렇습니다.”

브롬의 얼굴에서 심각함이 전해졌다. 왕은 뒤돌아 왕비를 살폈다. 왕비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왕은 브롬 일행에게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드넓은 침실을 가로질러 아치형 문을 지나 침실에 달린 작은 회의실로 데려갔고 왕비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회의실 문을 닫았다. 회의실은 앞뒤로, 좌우로 약 스무 걸음밖에 안 되는 작은 방이었다. 아늑한 의자가 몇 개 있었고 색색으로 물들인 커다란 유리 창이 나 있었다. 대 회의실에 가는 게 영 내키지 않는 날에는 가끔씩 이곳에서 정무를 봤다.

 

“폐하, 정보원에 따르면 맥클라우드 대표단이 페이비안 바다를 향해 동쪽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서쪽에 주둔한 우리 수색 병에 따르면 미개 왕국의 함선들이 북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분명 맥클라우드 왕족과의 회담을 위해 움직이는 게 확실합니다.”

맥길 왕은 방금 접한 정보를 분석하려 했으나 숙취의 여파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피곤함에 참을성을 잃고 재촉했다. 왕실을 둘러싼 끝없는 음모와 추측과 속임수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만일 정말 맥클라우드 왕가가 미개 왕국과 회동한다면 목적은 단 하나뿐입니다. 캐니언 협곡을 뚫고 링 대륙을 차지할 음모를 모의하려는 거겠죠.”

왕은 그의 곁에 오랫동안 머물러온 총 사령 고문관, 브롬을 바라봤다. 30여 년간 적군과 싸워온 브롬의 눈빛에 치명적인 진지함이 어려 있었다. 그 한 가운데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맥길 왕이 아는 한, 브롬은 두려움 따위는 모르는 사내였기에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왕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커다란 체구를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밖으로 시선을 옮겼고,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없는 왕궁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줄 곳 염두 해온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너무 이르오. 그쪽 왕자에게 공주를 시집 보낸 지 이제 겨우 며칠이 지났소. 그런데 지금 자네는 그들이 이미 우리를 정복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그 외에 다른 이유는 결코 없습니다. 모든 조짐을 합쳐 보아 이들의 회동은 평화적입니다. 무력충돌이 전혀 없습니다.”

바론의 대답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네. 동부 왕국이 왜 미개 왕국을 링 대륙 안으로 들이겠나. 그들이 왜? 만일 그들이 미개왕국을 도와 보호막을 뚫고 우리 서부왕국으로 들어온다 쳐도,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어떻소? 미개왕국은 결국 동부왕국도 넘볼 것이오. 동부왕국도 결코 안전하지 못해. 맥클라우드 왕가도 이를 분명 알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모종의 계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미개왕국의 진입을 허락하는 대신 우리 서부왕국만 공격하도록 약속을 받아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맥클라우드 왕이 링 대륙을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되니까요.”

맥길 왕은 고개를 저었다.

“맥클라우드 왕가는 매우 영리하오. 아주 간교하지. 미개왕국이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소.”

브롬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링 대륙을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나머지, 그런 기회나마 잡으려는 게 아닌가 사려됩니다. 더군다나 현재 폐하의 따님께서는 동부왕국의 예비 왕비이십니다.”

왕은 곰곰이 생각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당장은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이른 아침이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의견은 무엇이오?”

왕은 브롬과의 대화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다. 계속해서 추측만 난무하는 상황에 이미 지쳐버렸다.

“이 상황을 선점해야 합니다, 폐하, 동부왕국을 정복해야 합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놀란 왕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브롬을 바라봤다.

“내 딸을 시집 보내자마자 바로 공격을 하라는 것이오? 허락할 수 없소.”

“만약 그렇게 못하면, 그들이 우리 영토에 침범하도록 허락하는 거나 다름 없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예정된 일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나중에라도요. 만약 미개왕국과 손잡는다면, 서부왕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하이랜드 산악지대를 쉽게 넘지 못할 것이오. 산악지대의 모든 관문은 우리가 관리하고 있소. 그들의 병사만 대량 학살될 것이오. 설령 미개 왕국과 함께 공격한다 해도 말이오.”

“미개왕국은 수백만의 병사가 학살돼도 군사력에 큰 타격을 입지 않습니다. 수백만 병사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겁니다.”

“설령 보호막이 무너진다 해도 수백만 병사를 이끌고 캐니언 협곡을 넘거나 하이랜드 산악지대를 넘어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소. 함선을 타고 오는 것도 그렇소. 우리 병력이라면 이미 초기에 그들의 움직임을 감지할 것이고 경고를 보낼 것이오.”

맥길 왕은 심사숙고 했다.

“우리의 선 공격은 없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부턴 신중한 조치를 취할 것이오. 하이랜드 산악지대의 순찰병을 두 배로 늘리고 요새를 강화하시오. 정보원도 두 배로 늘리시오. 이 정도면 될 것이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대답을 마친 브롬이 함께 온 중사 두 명을 데리고 서둘러 회의실을 나섰다.

왕은 다시 창가로 몸을 돌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왕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다시 주변을 차근차근 둘러봤다. 왕궁과 요새, 눈 아래로 펼쳐진 깔끔한 궁중을 보며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

지금 술을 더 마신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제 24장

누군가가 옆구리를 가볍게 발로 툭툭 차는 바람에 토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밀짚 침대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토르는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궁금했다. 머리는 쇳덩이에 짓눌린 것 같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갈증이 밀려왔다. 머리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 욱신거렸다. 마치 낙마한 기분이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토르를 건드렸다. 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방안이 정신 없이 돌고 돌았다. 몸을 구부려 구역질을 했다. 계속 쏟아내고 쏟아냈다.

방안 가득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아보니 리스왕자, 오코너, 엘덴, 쌍둥이 형제가 가까이 다가와 토르를 내려다봤다.

“드디어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깨어났군!”

리스왕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다신 못 깨어나는 줄 알았다니까.”

오코너가 덧붙였다.

“괜찮은 거야?”

엘덴이 걱정했다.

토르는 손등으로 입을 닦고 몸을 다시 일으켰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자고 있던 크론이 낑낑거리며 달려와 토르의 품에 뛰어들어 머리를 비볐다. 크론과 함께라서 기뻤고 크론의 존재에 마음이 놓였다. 토르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가 어디야? 어제 어떻게 된 거지?”

일제히 웃음이 일어났다.

“네가 어제 과음을 했다네, 친구여. 맥주 마시고 맛이 갔어. 기억 안나? 선술집?”

토르는 두 눈을 감고 양쪽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어제밤일을 떠올렸다. 영상이 짤막하게 아른거렸다. 사냥을 마치고 선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신 장면이 떠올랐다. 사창가 계단 위로 올라간 기억도 났다. 그러나 그 이후로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웬돌린 공주가 생각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혹시 공주한테 얼굴도 들지 못할 바보 같은 짓을 한 건 아닐까? 이제 더 이상 공주를 볼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을까?

“어떻게 됐죠?”

심각해진 토르는 리스 왕자의 팔목을 꼭 붙들었다.

“제발 말해줘요. 그 여자랑 아무 일도 없었던 거죠?”

다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왕자만은 진정을 담아 토르를 바라봤다. 토르가 얼마나 속상해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걱정 마, 친구, 실수한 거 없어. 그 여자 방바닥에 토하다가 쓰러진 거 빼고는!”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됐다.

“첫경험 한번 제대로 망쳤군.”

엘덴이 말했다.

그러나 토르는 마음 속 깊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공주를 저버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다신 너한테 그런 돈 안 쓸 거야!

콘발이 말했다.

“정말 제대로 돈 낭비 했다고. 그 여자한테 돈도 다시 못 돌려 받았어!”

콘벤이 설명했다.

다들 웃어댔다. 토르는 창피하긴 했지만 공주와의 관계를 망치지 않았다는데 안도했다.

토르는 왕자의 팔을 가까이 끌어당겨 속삭였다.

“공주님 말인데요, 공주님은 어제 일에 대해선 모르시겠죠, 그렇죠?”

왕자의 입가에는 살며시 미소가 펴졌다. 왕자는 토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 일은 비밀로 해둘게. 네가 딱히 뭘 한 건 아니지만. 누나는 몰라. 네가 우리 누나를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 그 점 고맙게 생각해.”

왕자의 얼굴에 진지함이 묻어났다.

“이제 보니 네가 정말 우리 누나를 아끼는 게 느껴진다니까. 만약 네가 그 여자랑 잤다면, 널 내 매형 감으로 탐탁히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사실 말이야, 너한테 이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도 받았다니까.”

리스 왕자는 돌돌 말린 작은 종이를 토르의 손바닥에 쥐어줬다. 손바닥을 내려다 보니 왕가의 도장이 찍힌 분홍색 종이가 있었다. 누군지 짐작이 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누나가 보낸 거야.”

“우와!”

탄성이 울려 퍼졌다.

“어서 읽어봐!”

엘덴이 소리쳤다.

다같이 웃으며 맞장구 쳤다.

그러나 토르는 은밀히 읽고 싶었다. 서둘러 이들과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았지만 문제될게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우아한 양피지를 펼쳐 읽었다.

“리지 숲에서 정오에 만나. 늦지마.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마.”

토르는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뭐라고 써있어, 바람둥이?”

콘벤이 소리쳤다.

토르는 서둘러 리스 왕자에게 갔다. 왕자만은 믿을 수 있었다.

“오늘 부대 훈련 없죠, 맞죠?”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없지, 오늘은 휴일이잖아.”

“리지 숲이 어디 있어요?”

왕자가 미소 지었다.

“아,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야. 동쪽 길을 따라 궁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 작은 산을 올라가다가 두 번째 언덕 지나면 나와.

토르는 왕자를 바라봤다.

“부탁해요,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줘요.”

왕자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분명 누나도 그러길 바랄 거야. 만약 어머니께서 아시면 둘 다 가만 안 둘걸. 누나는 방에 감금되고 넌 왕국의 서쪽 끝으로 추방당할지도 몰라.”

생각만으로도 두려워 토르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이요?”

*

이른 아침부터 토르는 걸음을 재촉했다. 크론을 옆구리에 끼우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이 길을 나섰다. 왕자가 일러준 대로 열심히 길을 찾아갔다. 머릿속으로 길을 대뇌이며 왕궁 밖으로 나갔고, 작은 산에 올라 울창한 숲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왼쪽으로 낭떠러지가 펼쳐진 가파른 산등성이의 좁을 길이었다. 그렇게 왼쪽으로는 절벽, 오른쪽으로는 숲이 이어졌다. 리지 숲, 바로 공주가 만나자는 장소였다. 공주는 진심일까? 그저 혹시 장난을 치는 것일까?

알톤은 참으로 뻔뻔한 왕족이 아닌가? 토르는 결국 공주의 장난감에 불과할까? 공주가 곧 실증을 낼까? 토르는 그 누구보다 간절히 그런 일은 없길 바랬다. 공주의 감정이 진심이라 믿고 싶었다. 비록 그런 일이 가당하기나 한지 스스로도 의문을 품었지만. 공주는 이제 겨우 토르와 몇 마디 나눴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왕족이었다. 토르에게 어떤 관심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공주는 토르보다 두 살 연상인데다 지금까지 연상이 토르를 좋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사실 그 어떤 소녀도 토르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고향에는 만남을 가질만한 소녀들이 거의 없었다.

토르는 여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여자 형제도 없었고 마을에는 또래 이성이 거의 없었다. 토르 또래의 소년들 또한 그다지 여자에 관심 없었다. 열여 덜 살이 넘어야 결혼하는 추세였고 그나마도 사업계약을 맺듯 정략 결혼을 올렸다. 계급이 높은 미혼 남자는 스물 다섯이 되는 날 선택의 날을 맞이한다. 신붓감을 고르거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으면 밖으로 나가 한 명을 데려와야 한다. 그러나 이도 토르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토르는 가난했다. 결혼 적령기의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부모가 원하는 결혼을 하기 마련이었다. 소를 거래하는 방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웬돌린 공주를 보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처음으로 토르는 무언가에 완벽히 마음을 빼앗겼다. 너무나 깊고 강하고 다급한 감정에 사로잡혀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공주를 볼 때 마다 이러한 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공주와 함께 있지 않으면 가슴이 아려오기까지 했다.

산등성이를 따라 속도를 두 배로 높였다. 이곳 저곳을 샅샅이 둘러보며 공주를 찾았다. 만나자는 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과연 공주가 만나러 오기는 할지 궁금증이 계속됐다. 첫 번째 태양이 높이 치솟았고 토르의 이마에 땀방울이 조금씩 맺혔다. 전날 밤의 여파로 여전히 불쾌하고 메스꺼웠다. 하늘높이 떠있는 태양 아래 공주를 아무리 찾아봐야 찾을 수가 없었다. 공주가 정말 토르를 만나러 올지도 의문이었다. 토르는 어느새 공주에게 뺏긴 마음이 초래할 위험을 생각하고 있었다. 왕비가 진정으로 계속 반대한다면, 토르의 결말은 결국 추방이 될 것인가? 왕의 부대에서도?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으로부터도? 그렇다면 무얼 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토르는 심사숙고 끝에 공주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이 모든 게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 공주를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다만 섣부른 판단으로 바보같이 공주가 자신을 많이 좋아한다고 착각하지 않기만을 바랬다.

“내 옆에서 같이 걸을 참이었니?”

누군가가 말을 걸고 이내 킥킥 웃었다.

무방비 상태였던 토르는 깜짝 놀랐다. 돌아보니 소나무 그늘아래 공주가 미소를 가득 안고 서 있었다. 그 미소에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주의 눈빛에 애정이 가득했고 그 눈빛에 지금까지 끌어안고 있던 모든 걱정과 두려움이 단번에 녹아 내렸다. 혼자서 바보같이 공주의 의도를 의심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공주를 보자 크론이 칭얼거렸다.

“어머 이게 뭐야?!”

공주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공주가 무릎을 구부리자 크론이 칭얼거리며 뛰어가 공주의 팔에 안겼다. 공주는 크론을 품에 안고 쓰다듬어주었다.

“너무 귀여워!”

공주가 크론을 꼭 안았다. 크론이 공주의 얼굴을 핥았고 공주는 킥킥거리며 크론에게 뽀뽀했다.

“이름이 뭐니, 작은 친구야?”

공주가 크론에게 물었다.

“크론.”

토르가 대답했다. 이번엔 더듬지 않고 제대로 대답했다.

“크론.”

크론과 시선을 마주친 공주가 따라 외쳤다.

“그럼 항상 이 표범 친구와 함께 다니는 거야?”

“제가 발견한 거에요, 숲에서요. 사냥하던 날이요. 공주님 첫째 오빠 분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발견했으니 제가 돌봐줘야 한대요.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래요.”

언제나 그렇듯 토르는 공주를 의식하며 대답했다.

공주는 진지한 얼굴로 토르를 쳐다봤다.

“음, 오빠 말이 맞아. 동물은 신성한 존재야. 네가 발견한 게 아니야. 동물이 널 찾은 거지.”

“크론이 같이 있어도 괜찮을까요?”

공주가 킥킥 웃었다.

“크론이 같이 있지 않으면 오히려 서운할 거야.”

공주는 좌우를 살펴 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토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토르를 숲 속으로 데려갔다.

“가자, 다른 사람 눈에 뛰기 전에.”

공주가 토르의 손을 이끌고 숲 속 산책길로 안내했고 전해지는 공주의 감촉에 토르는 마냥 들떴다. 두 사람은 소나무 숲 한복판에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서둘러 숲으로 들어갔다. 공주는 토르의 손을 놓았지만 그 감촉만은 계속해서 토르의 마음속에 머물렀다.

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생각에 이내 마음이 놓였다. 공주는 확실히 그 누구의 눈에도 뛰고 싶어하지 않았다. 특히 왕비의 눈에. 분명 공주는 토르와의 만남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녀도 위험을 감수하고 토르를 만나는 것이지 않나.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선 공주가 알톤이나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게 아닌가 생각됐다. 어쩌면 알톤이 옳았다. 공주는 토르와 있는 게 창피할 수도 있다.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토르를 에워쌌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공주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말을 걸었다.

토르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속 생각들을 공주에게 말하면 공주와의 관계를 망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렇지만 자신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공주에게 다 털어놔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주의 입장이 어떤지 알아야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공주님이 저번에 먼저 가버리셨을 때요, 알톤 공작을 만났어요. 공작님이 제 앞에 나타났어요.”

공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명랑함이 사라졌고 이에 토르는 데 죄책감을 느꼈다. 공주의 밝은 성격과 즐거운 마음을 소중히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방금 한 말을 다시 거두고 싶었다. 그만 했어야 했는데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알톤이 뭐라고 했어?”

“공주님한테서 떨어지라고 했어요. 공주님께서 진심으로 절 대하는 게 아니라고요. 공작님에 따르면 전 그냥 장난감 같은 거래요. 하루 이틀이면 공주님이 제게 질릴 거래요. 또 두 분이 결혼하기로 했고 이미 결혼 준비도 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화가 난 공주는 조소를 터트렸다.

“알톤이 그랬어?”

공주가 콧방귀를 꼈다.

“정말 너무 건방지고 참을 수 없는 입안의 가시 같은 존재야. 내가 걸음마를 뗐을 때부터 거슬리기 시작했어. 우리 부모님과 사촌이라는 이유로 알톤도 스스로를 왕족이라고 여겨. 그렇게 왕족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는 처음이야. 더군다나 알톤은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 둘이 결혼할 운명이라고 생각해. 내가 부모님이 시키는 데로 다 할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니까. 절대 아니거든. 절대 알톤하고는 결혼 안 해. 보기만해도 끔직한걸.”

공주의 대답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훨씬 가벼워진 마음에 나무 꼭대기에 올라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토르가 듣고 싶던 바로 그 대답이었다. 이제서야 아무것도 아닌 일로 두 사람의 분위기를 어둡게 한 사실에 미안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여전히 공주가 토르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너에 대해서는.”

공주가 살짝 토르의 얼굴을 살핀 뒤 고개를 돌렸다.

“난 넌 잘 몰라. 내 감정이 어떤 건지 지금 당장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이렇게 말해 줄 순 있어. 내가 만약 널 싫어한다면 만나지 않았을 거야. 물론 언제든 마음을 바꿔 먹을 수도 있고 변덕을 부릴 수도 있어. 하지만 사랑에 관한 한 그렇지 않을 거야.”

그 정도면 토르에겐 충분한 대답이었다. 공주의 진지함에 감명받았고 공주가 언급한 사랑이라는 단어도 인상 깊었다. 두려웠던 마음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나도 네게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어. 사실 내가 너보다 잃을게 훨씬 많아. 결국 나는 왕족이고, 넌 평민이잖아.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너보다 내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너에 관한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와. 권력에 눈이 멀어 신분상승을 위해 나를 이용하고 있다고. 왕이 되려 한다고. 내가 이런 말들을 믿어야 할까?”

토르는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에요, 공주님! 절대요. 꿈에라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제가 여기 공주님 곁에 있는 건 공주님께서 안 계신 다른 곳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에요. 단지 곁에 있고 싶어서 그런 거에요. 공주님께서 곁에 없으면 공주님 생각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런 거에요.”

공주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드리워졌고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넌 여기 새로 왔잖아. 왕실이 처음이고, 왕실 생활도 처음이잖아.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기까진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여기선 그 누구도 진심을 말하지 않아. 모두에겐 각자의 의도가 있어. 모두 다 권력을 쫓지. 권력이 아니면 지위나 부 또는 돈과 명예를 탐해. 그 누구도 아무것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각자가 정보원과 파당을 두고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지. 일례로, 알톤이 네게 우리의 결혼이 이미 예정됐다고 말했던 건 다름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떤지 떠보려는 의도였을 거야. 두려웠겠지. 어쩜 누군가에게 벌써 도움을 요청했을지도 몰라. 알톤에게 결혼은 사랑이 전제가 되는 일이 아니야. 단지 동맹이지. 순수하게 재정적인 이득과 계급 상승, 재산증식을 위한 수단이지. 우리 왕궁에서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순간 크론이 전속력을 다해 숲 속 내리막길에 있는 공터로 뛰어갔다.

공주는 토르를 보며 킥킥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토르의 손을 잡고 크론을 쫓아 달렸다.

“빨리!”

신이 난 듯 공주가 외쳤다.

산책로를 따라 뛰어 내려가니 커다란 공터가 펼쳐졌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장관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형형색색의 야생화로 가득한 아름다운 초원이었다. 온갖 종류의 새와 나비가 공중에 날아다녔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생동감이 넘쳤다. 태양이 찬란하게 초원을 비췄다. 어두운 숲 한가운데 숨어있는 비밀의 공간 같았다.

“눈 가리고 숨바꼭질 해본 적 있니?”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공주는 목에 맨 손수건을 꺼내 등뒤에서 토르의 눈을 가렸다. 토르의 눈앞이 컴컴해졌고 공주는 토르의 귓가에 킥킥거렸다.

“네가 술래야!”

공주가 잔디 너머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죠?”

“날 찾아봐!”

공주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눈을 가린 토르는 공주를 찾아 나섰다. 걸을 때마다 발을 헛디뎠다. 공주의 치마자락이 나풀거리는 소리에 의지해 공주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꽤 어려웠다. 두 손으로 눈 앞을 더듬어가며 공터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나무에 부딪히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향을 잃었고 계속해서 빙빙 돌고만 있었다.

토르는 다시 멀리서 들려오는 공주의 웃음소리에 의지해 방향을 바꿔 뛰었다. 어느 순간 공주가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가도 어느 순간 공주가 멀리 가버린 것 같았다. 점점 어지러웠다.

크론이 토르 옆에서 달렸다. 크론이 날카롭게 짖었고 덕분에 토르는 공주 대신 크론을 쫓았다. 그러자 공주의 웃음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기특하게도 크론이 토르를 공주에게 안내하고 있었다. 숨바꼭질 놀이를 금새 이해하는 크론의 영리함에 토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제 공주와의 거리가 몇 걸음 안으로 좁혀졌고 토르는 이쪽저쪽으로 공주를 찾았다. 손을 뻗어 공주의 옷자락을 잡았고 공주는 즐거움에 소리를 질렀다. 공주의 옷자락을 잡은 순간 토르가 발을 헛디뎠고 덕분에 두 사람은 바닥에 넘어졌다. 토르는 재빨리 몸을 돌려 공주를 몸으로 받아냈다.

 

토르 위로 넘어진 공주가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공주는 이내 킥킥 웃어댔고 눈을 가린 손수건을 풀어줬다.

공주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자니 심장이 요동쳤다. 토르는 온 몸으로 공주를 지탱했다. 얇은 여름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공주의 몸매가 느껴졌다. 공주는 토르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의지했다. 공주가 토르와 시선을 맞추자 두 사람의 호흡이 얕아졌다. 공주는 시선을 고정했고 토르 또한 공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바람에 정신까지 혼미했다.

갑자기 공주가 몸을 앞으로 숙여 토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세상 그 무엇보다 부드러웠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난생 처음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토르가 눈을 감자, 공주도 눈을 감았고 두 사람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입을 맞추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토르로서는 이 순간을 영원히 붙잡고 싶었다.

드디어 공주가 살포시 입술을 뗐다. 공주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여전히 토르 위였다.

두 사람은 눈을 맞추고 그 자리에 오래도록 누워있었다.

“넌 어디서 온 거니?”

미소를 가득 담은 공주가 부드럽게 물었다.

토르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전 그냥 평범한 소년이에요.”

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느낄 수 있어. 넌 평범한 그 소년 이상이야.”

공주가 몸을 기울여 다시 토르에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맞닿았고 이번에는 더 오랜 시간 입을 맞췄다. 토르가 손을 뻗어 공주의 머리카락을 쓸었고 공주도 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동치는 심장이 멈추질 않았다.

토르는 벌써부터 둘 사이의 앞날이 걱정됐다. 이들을 반대하는 수많은 세력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게 가능한 것인가? 두 사람이 진정 연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세상 그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하길 절실히 바랬다. 지금 이 순간, 공주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앞섰다. 그렇게 꿈꾸던 왕의 부대를 저버릴 만큼.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잔디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라 돌아봤다. 크론이 이들로부터 한발자국 떨어진 잔디 위로 달려들었고 또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론이 날카롭게 짖고 으르렁거렸다. 곧이어 쉬이 하는 소리가 이어졌고 이내 다시 조용해졌다.

공주는 토르에게서 떨어졌고 두 사람 모두 동시에 일어나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던 토르는 재빨리 일어서서 공주를 보호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지만 짐승이든 사람이든 한발자국 떨어진 웃자란 잔디 속에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눈 앞에 크론이 나타났다. 작고 날카로운 크론의 이빨 사이로 커다란 백사가 매달려 있었다. 3미터 가까이 되는 길이에 밝고 윤이 나는 백색이었다. 몸통은 커다란 나뭇가지만큼 두꺼웠다.

순간 모든 상황이 정리됐다. 크론이 치명적인 뱀의 공격으로부터 두 사람을 구해낸 것이다. 토르는 새끼 표범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웬 공주가 경악했다.

“백사, 왕국에서 가장 치명적인 파충류.”

토르는 경외감에 백사를 바라봤다.

“실제로 이 뱀이 존재하는지 몰랐어요. 그냥 전설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매우 희귀해, 나도 기존에 딱 한번 봤었어. 우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날. 이 뱀은 흉조야.”

공주는 놀라 토르를 바라봤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뜻이야.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

토르의 등줄기에 오싹함이 전해졌다. 한 여름 초원에 갑작스런 한기가 흘렀다. 토르도 알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백사가 죽음의 흉조라는 사실을.

Купите 3 книги одновременно и выберите четвёртую в подарок!

Чтобы воспользоваться акцией, добавьте нужные книги в корзину. Сделать это можно на странице каждой книги, либо в общем списке:

  1. Нажмите на многоточие
    рядом с книгой
  2. Выберите пункт
    «Добавить в корзин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