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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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з серии: 마법사의 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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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에레크 명장은 남쪽 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렸다. 명장은 전 속력으로 말을 달리며 어둠 속에서 말이 웅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알리스테어가 노예상에게 팔려가 발러스터로 끌려간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었다. 명장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여관 주인을 믿었던 자신이 너무 어리석고 순진했다. 여관 주인이 약속을 어길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도 못했다. 명장이 마상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나면 약속대로 알리스테어에게 자유를 줄 거라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다해온 명장이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자신의 말을 지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명장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그가 아닌 알리스테어가 치르고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자 에레크 명장은 구멍이 뚫린 듯 가슴이 아파왔다. 명장은 더욱 힘차게 말을 달렸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이 여관에서 일하는 불명예를 겪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노예상에게 성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생각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에 대한 책임이 바로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녀의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여관 주인에게 제안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여관 주인은 이 모든 일을 벌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깊은 밤 에레크 명장은 알리스테어를 찾아 빠르게 질주했다. 말이 질주하며 일으키는 말발굽 소리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며 달리는 말의 호흡소리가 명장의 귓가에 가득 울렸다. 말 또한 명장처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명장도 힘에 부쳐 말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명장은 마상 경기 직후 한시도 쉬지 않고 바로 여관으로 향했고 이제는 더 이상 지칠 수도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더 이상의 기력이 남아있지 않아 달리는 말 위에 고삐를 붙들고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명장은 서서히 감기는 눈을 애써 부릅뜨며, 잠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명장은 보름달 쏟아지는 달빛을 흠뻑 받으며 발러스터가 있는 남쪽으로 질주했다.

에레크 명장은 어린 시절부터 발러스터라는 곳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비록 한번도 직접 방문한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은 도박과 마약과 성 매매 등 왕국의 온갖 부도덕한 일들이 팽배하게 이뤄지는 곳이었다. 그곳은 링 대륙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알려진 모든 종류의 어두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곳은 에레크 명장의 성품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명장은 한번도 도박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고 술에 취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여유가 생길 때면 언제나 훈련에 매진하여 전사로서의 기질을 갈고 닦았다. 명장으로서는 발러스터를 찾아가는 유형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나태하게 삶을 보내고 환락을 품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발러스터에 가는 것 자체가 불길한 징조였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 곳으로 향하는 알리스테어 생각에 명장은 가슴이 메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구해야 했다. 발러스터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기 전에 속히 그녀를 그곳에서 빼내와야 했다.

달은 점차 기울어졌고 어느새 달리던 길이 넓어지기 시작하며 말을 달리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에레크 명장은 눈 앞에 펼쳐진 도시를 바라봤다. 수도 없이 많은 횃불이 벽에 걸린 모습이 마치 도시 전체가 어둠 속을 밝히는 모닥불처럼 보였다. 예상했던 모습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발러스터에 머무는 사람들은 밤새 향락에 빠져 잠을 자지 않는다고 했다.

명장은 더욱 박차를 가해 달렸고 눈 앞의 도시가 더욱 가까워지며 마침내 작은 목재 다리를 건넜다. 다리의 양 옆으로 횃불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고 다리를 지키는 보초는 잠에 취해 꾸뻑거렸다. 에레크 명장이 번개처럼 다리를 건너가자 졸던 보초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 몸을 일으켰다. 보초는 에레크 명장을 불러 세우기 위해 소리쳤다. “이봐!”

그러나 명장은 멈추기는커녕 속도를 줄이지도 않았다. 보초가 용기를 내 에레크 명장을 쫓아올 일도 없었을 테지만 만약 그랬다면 에레크 명장은 자신의 길을 막는 보초를 죽일 생각이었다.

명장은 계속해서 달려 도시로 진입하는 입구에 들어섰다. 입구는 사각형 모양을 띠고 있었고 가장자리는 고대의 석조 벽면으로 이뤄져 있었다. 명장은 그대로 입구를 지나 좁게 난 길가로 들어섰다. 길의 양 옆으로 횃불이 늘어서 어둠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도시 내부에 빽빽이 줄지어 선 건물들 덕분에 도시 내부는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거리 위의 사람들은 모두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서로 몸을 부딪혔다. 거대한 파티가 벌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건물마다 여관과 도박장이 보였다.

에레크 명장은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알리스테어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걸 확신했다. 명장은 자신이 너무 늦게 도착한 게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침을 삼켰다.

명장은 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남다르게 큰 규모를 자랑하는 여관 앞까지 말을 타고 달렸다. 여관 앞에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있었다. 명장은 이곳부터 수색해보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서둘러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술에 취해 소란을 떠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여관 주인을 찾았다. 여관 주인은 실내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그들에게서 돈을 받은 뒤 그들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러던 중 에레크 명장과 눈이 마주친 여관 주인은 명장에게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을 드릴까요, 손님?” 여관 주인이 물었다. “아니면 찾는 계집이 있으신가요?”

명장은 고개를 저으며 소란 속에서 여관 주인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여관 주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을 찾고 있네.” 명장이 대답했다. “노예상이오. 그자는 사바리아에서 이곳으로 왔네. 아마 이곳에 온지 하루 정도 됐을 거네. 값 나가는 화물을 가지고 왔네. 노예들을 태운.”

여관 주인은 입술을 핥았다.

“손님께서 원하시는 건 아주 귀한 정보입니다.” 여관 주인이 답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어요. 방을 제공하는 것만큼 제겐 쉬운 일이죠.”

여관 주인은 앞으로 바짝 다가와 손가락을 비비며 명장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는 명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고 입가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에레크 명장은 여관 주인이 역겨웠지만 정보를 얻어야 했다. 또한 일분 일초를 지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주머니에 손을 넣어 커다란 금화를 꺼내 여관 주인에게 건넸다.

금화를 이리저리 살피던 여관 주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왕의 금화군요.” 여관 주인이 여전히 금화를 살피며 감탄을 자아냈다.

여관 주인은 호기심과 존경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명장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럼 왕실에서 여기까지 말을 타고 달려오신 건가요?” 여관 주인이 물었다.

“질문은 됐네.” 에레크 명장이 대답했다. “질문은 내가 했네. 그리고 대가도 치렀네. 이제 대답해보게. 노예상은 어디 있나?”

여관 주인은 입술을 여러 번 핥더니 명장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 사람은 엘봇이라고 합니다. 이 도시에 새로운 창녀들을 데리고 일주일에 한번씩 방문하지요. 창녀들을 경매에 붙여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에게 팔아버립니다. 놈의 소굴로 가면 놈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길이 끝날 때까지 쭉 따라가면 그곳에 놈의 영업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찾는 계집이 꽤 괜찮은 계집이라면, 아마도 벌써 팔리고 없을 겁니다. 엘봇이 데려오는 창녀들은 모두 금새 팔려버리니까요.”

에레크 명장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순간, 기분 나쁘게 축축한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놀랍게도 여관 주인이 겁도 없이 명장을 잡아 세우고 있었다.

“만약 창녀를 찾으시는 거라면, 제가 데리고 있는 애들은 어떠십니까? 여기 계집들도 그가 데리고 오는 계집만큼 훌륭합니다. 그러나 가격은 절반에 불과하죠.”

에레크 명장은 여관주인이 역겨웠다. 만약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여관 주인을 죽여 없애버렸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악한 자를 한 명이라도 더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명장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여관 주인은 그런 수고조차 필요 없는 인간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자신을 잡은 여관 주인의 손을 뿌리치고 그에게 가까이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한번 내게 손을 대면,” 에레크 명장이 경고했다. “그럼, 그 행동을 후회하게 해주겠다. 알겠으면 뒤로 두 걸을 물러서라. 내가 이곳에서 내 손에 들린 이 검을 휘두르기 전에.”

여관 주인은 흠칫 놀라 공포에 젖은 눈빛으로 고개를 풀 숙이고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에레스 명장은 지체 없이 그곳을 빠져 나왔다. 앞을 막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밖으로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명장은 술 취한 주정쟁이들이 이리저리 옆을 기웃거리며 탐을 내고 있던 자신의 말에 달려가 올라탔다. 의심의 여지 없이 주정쟁이들이 자신의 말을 훔치려고 했던 게 분명했다. 만약 그들이 말을 훔쳐가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지를 생각하니 끔찍했다. 명장은 앞으로는 말을 더욱 단단히 메어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에레크 명장은 범죄와 부패가 팽배한 이 도시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명장의 애마, 와크핀은 훌륭한 군마였다. 누구든지 와크핀에게 접근해 데려가려 한다면 와크핀이 그 자리에서 그 자를 밟아 죽일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와크핀에게 힘껏 발길질을 했고 명장과 와크핀은 좁은 길을 따라 달려 나갔다. 명장은 북적 이는 인파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렸다. 아주 늦은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에는 더욱 많은 인파가 모여들며 서로 몸을 부대끼고 있었다. 명장이 빠르게 달려나가자 몇몇 주정쟁이들이 명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명장은 개의치 않았다. 알리스테어가 근방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그녀를 되찾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마침내 석조 벽이 길 앞을 가로막으며 막다른 골목임을 알렸다. 오른쪽에 위치한 가장 마지막 건물은 기울어진 여관이었다. 하얀 벽토가 발린 건물에 초가 지붕을 이고 있는 한물간 건물이었다. 그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한 명장은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말에서 내린 명장은 말뚝에 단단히 말을 고정시킨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눈앞의 모습에 놀라 이내 가던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내부는 아주 어두웠다. 커다란 방에는 꺼져가는 횃불 몇 개만이 어둠을 겨우 밝히고 있었고 저 멀리 한쪽 구석에는 불이 제대로 붙지 않은 벽난로가 켜져 있었다. 곳곳에 깔린 이불 위에는 수 많은 여자들이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도 못한 채 두꺼운 밧줄에 몸이 묶여 벽에 고정돼 있었다. 여자들이 모두 약에 취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부는 아편 냄새가 진동을 했고 이곳 저곳에서 아편을 피운 파이프가 서로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고급스럽게 옷을 차려있은 남자 몇 명이 방안을 돌아다니며 이불 위에 널브러진 여자들의 다리를 발로 툭툭 건드려봤다. 마치 어떤 물건을 살지 물건을 고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작은 붉은색 벨벳 의자 위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명주 가운을 두른 그는 양 옆으로 여자들을 사슬에 묶어 대동하고 있었고 그의 뒤로는 엄청난 거구의 근육질을 자랑하는 사내들이 있었다. 사내들의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했고 모두가 에레크 명장보다 키가 크고 체격이 컸으며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해치우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을 살핀 에레크 명장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바로 짐작했다. 다름 아닌 성 매매 장소였다. 이곳에 있는 여자들은 자신을 사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저 구석에 앉아있는 남자가 바로 알리스테어를 데려간 우두머리인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는 알리스테어 외에도 여기 있는 모든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 왔을 것이다. 어쩌면 알리스테어가 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명장은 서둘러 여자들이 늘어선 방 안을 둘러보며 여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방 안에는 수실명의 여자들이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방 안이 너무 어두워 얼굴을 식별하기가 힘들었다. 명장은 통로를 따라가며 한 사람씩 얼굴을 살폈다. 순간 누군가가 손바닥으로 명장의 가슴을 쳤다.

“돈은 냈소?” 거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구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명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를 구경하고 싶으면, 돈을 내시오.” 사내는 중 저음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의 규칙이오.”

명장은 분노가 솟구쳤다. 거구의 사내가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명장은 어느새 손 끝으로 사내의 목젖을 가격했다.

사내는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 않아 양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명장은 앞으로 다가가 팔꿈치로 사내의 관자놀이를 가격했고 사내는 그대로 얼굴을 바닥에 떨구며 기절했다.

명장은 다시 방안에 있는 여자들의 얼굴을 살피며 간절하게 알리스테어를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알리스테어는 이곳에 없었다.

에레크 명장은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한쪽 구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우두머리를 향해 서둘러 다가갔다.

“맘에 드는 계집을 찾으셨나요?” 우두머리가 물었다. “돈을 걸만 한 물건을요?”

“난 한 아가씨를 찾고 있네.” 명장이 강철같이 차갑고 단호한 어조로 애써 화를 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난 같을 말을 두 번 하지 않을 것이네. 그 여인은 키가 크고 긴 금발머리에 청록 빛 눈동자를 지녔네. 이름은 알리스테어. 하루나 이틀 전에 사라비아에서 이곳으로 끌려왔네. 그 여인이 이곳으로 끌려왔다고 들었네. 사실인가?”

우두머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씩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손님께서 찾으시는 물건은 이미 팔려갔습니다.” 우두머리가 대답했다. “아주 훌륭한 물건이었죠. 취향이 고상하시네요. 다른 물건을 한번 찾아보시죠. 조금 깎아드리겠습니다.”

에레크 명장은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분노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누가 그 여인을 데려갔나?” 명장이 무섭게 다그쳤다.

우두머리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그 노예한테 꽂히셨군요.”

“그 여인은 노예가 아니네.” 에레크 명장이 역정을 냈다. “그녀는 내 부인이네.”

우두머리는 놀란듯한 눈으로 에레크 명장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젖히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손님 부인이라니! 농담도 잘하시네요. 그렇지만 더 이상은 아니죠, 손님. 이제 그 물건은 다른 사람의 장난감이 됐습니다.” 우두머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둡게 변했다. 얼굴을 찌푸린 그의 모습은 마치 악마 같았다. 그는 뒤에 서있는 두 사내들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이제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좀 치워버려.”

근육이 우락부락한 두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에레크 명장 앞에 나타났다. 명장은 두 거구의 민첩함에 흠칫 놀랐다. 두 사내는 명장을 제압하기 위해 손을 뻗어 명장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두 사내는 자신들이 누구에게 덤비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명장은 두 사람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민첩했다. 명장은 재빨리 옆으로 비켜 뒤에서 한 사내의 손목을 잡아 뒤로 비틀었다. 사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명장은 동시에 팔꿈치로 다른 사내의 목을 가격했다. 명장은 앞으로 몸을 돌려 바닥에 누워있는 사내의 코를 가격해 코뼈를 으스러트렸다. 코뼈가 부서진 사내는 정신을 잃고 목을 붙잡고 바닥에 드러누운 다른 사내 위에 쓰러졌다.

두 사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에레크 명장은 사내들을 밟으며 우두머리에게 가까지 다가갔다.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우두머리는 두려움에 떨며 앉은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명장은 허리를 숙여 우두머리에게 가까이 다가가 주먹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쥐고 다른 손으로 단검을 꺼내 그의 목에 겨눴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말하거라. 그럼 살려줄 수도 있다.” 에레크 명장이 노여움을 토했다.

우두머리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말해요, 할게요. 그렇지만 다 시간 낭비입니다.” 우두머리가 입을 열었다. “귀족에게 팔았어요. 그분은 군대를 가지고 있고 궁전에 살아요. 엄청난 권력가에요. 그분의 궁전은 한번도 침략당한 적이 없어요. 더군다나 그분은 엄청난 병력을 가졌죠. 어마어마한 부자에요. 그분 주변에는 언제든지 목숨을 걸 용병들이 있다고요. 그분은 직접 거래한 계집을 모두 데리고 있어요. 손님의 부인을 거기서 데려오는 건 불가능한 입입니다. 그러니 그냥 왔던 곳으로 돌아가세요. 그녀는 이제 없습니다.”

명장은 단검을 더욱 세게 들이밀었고 우두머리의 목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우두머리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귀족은 어디 있는가?” 이성을 잃은 에레크 명장이 다그쳤다.

“그분의 궁전은 서쪽 마을에 있습니다. 도시의 서쪽 출입구를 지나 길이 끝날 때까지 쭉 따라가세요. 그럼 궁전이 보일 겁니다. 그러나 다 헛수고에요. 그분은 그 여자에게 엄청난 가격을 지불했습니다. 제가 부른 값보다 훨씬 비싼 값에 데려갔습니다.”

에레크 명장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그를 죽였다. 그러자 그의 몸이 의자 위로 축 늘어지며 사방으로 피가 분출했다.

명장은 죽은 우두머리를 바라본 뒤 다시 그의 두 심복들을 바라봤다. 이 곳이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곳이 존재한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에레크 명장은 방 안을 가로질러 여자들을 묶어둔 두꺼운 밧줄을 끊어버리고 잡혀온 여자들을 모두 풀어줬다. 사방에서 묶여있던 여자들이 재빨리 몸을 일으켜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내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모두가 서둘러 도망가기 위해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몇몇 여자들은 약에 취해 움직이질 못했고 다른 여자들이 그들을 부축했다.

“당신이 누구시든.” 한 여자가 문 앞에 서서 에레크 명장에게 말을 건넸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어디를 가시던지, 신의 가호가 함께할 것입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기도에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의 말대로 명장은 앞으로 가야 할 곳에서 반드시 신의 가호가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

제 10장

새벽이 밝아왔다. 일레프라가 사는 오두막의 작은 창문 틈으로 들어온 새벽 빛이 그웬돌린 공주의 감은 두 눈을 비추며 공주를 잠에서 깨우고 있었다. 첫 번째 태양이 소리 없이 주황빛 빛을 뿜으며 공주를 어루만졌고, 고용한 새벽녘 공주의 잠을 쫓아냈다. 공주는 졸린 눈을 깜빡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자신이 잠든 곳이 어딘지 주변을 둘러봤고 그제서야 다시 걱정이 몰려왔다.

 

고드프리 오빠.

그웬 공주는 고드프리 왕자가 누워있는 침대 옆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일레프라는 고드프리 왕자의 바로 곁에서 그를 간호하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아주 긴 밤을 보냈다. 밤새 고드프리 왕자는 신음을 토하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고 일레프라는 그런 왕자의 곁에서 쉴새 없이 왕자를 간호했다. 공주 또한 고드프리 왕자의 곁을 지키며 뭐든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수건을 적셔 고드프리 왕자의 이마를 덮어줬고 수건이 뜨거워지면 다시 수건을 차갑게 갈아줬다. 또한 일레프라가 시키는 대로 약초와 연고를 계속해서 찾아다 줬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밤이었다. 고드프리 왕자는 몇 번이고 비명을 질렀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이따금씩 아버지를 불러대는 고드프리 왕자의 모습에 공주는 등골이 오싹했다. 마치 아버지께서 이곳에 함께 계시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의 곁을 아버지께서 함께 지켜주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늘 긴장감이 팽배했던 관계 속에서 줄다리기를 버리던 두 사람이었기에 공주는 아버지가 고드프리 오빠의 죽음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공주가 이곳에서 잠을 청한 이유는 딱히 갈 곳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왕실로 돌아가기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개리스 왕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불안했다. 공주는 오히려 이곳이 안전했다. 일레프라의 곁에서 아코드와 펄톤이 보초를 서는 이곳이 공주에겐 더욱 안전했다. 아무도 공주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를 거라 짐작했고 공주는 그 편이 마음이 놓였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더욱 가까워지며 그 동안 알지 못했던 고드프리 왕자의 새로운 모습을 본 공주로서는 고드프리 왕자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지가 않았다.

공주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고드프리 왕자 곁에 다가갔다. 밤새 무사했는지 확인하려니 공주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가 만약 어젯밤을 잘 넘겼으면 이제는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젯밤이 고비였다고 생각했다. 일레프라도 잠에서 깨 고드프리 왕자를 살폈다. 밤새 고드프리 왕자를 간호하다 잠이 든 그녀였다. 그웬 공주는 그녀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리쬐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환해진 오두막 안에서 두 사람은 고드프리 왕자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공주는 고드프리 왕자의 손목을 잡고 살며시 흔들었고 일레프라는 손바닥으로 왕자의 이마를 짚었다. 일레스파는 두 눈을 감고 숨을 쉬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고드프리 왕자가 감고 있던 두 눈을 크게 떴다. 일레프라는 깜짝 놀라 왕자를 짚고 있던 손바닥을 황급히 뗐다.

공주 또한 놀랐다. 고드프리 왕자가 이렇게 빨리 눈을 뜰 줄은 몰랐다. 왕자는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봤다.

“고드프리 오빠?” 공주가 말을 걸었다.

고드프리 왕자는 눈을 찌푸리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내 다시 눈을 크게 뜨더니 놀랍게도 양 팔로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지금이 몇 시지?” 왕자가 다급히 물었다. “여기가 어디야?”

왕자의 목소리는 생기가 가득했다. 놀랍도록 건강해 보였다. 공주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안도하며 일레프라와 함께 이제서야 활짝 웃었다.

그웬 공주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고드프리 왕자를 꼭 끌어안았다.

“오빠 살아있어요!” 공주가 감격했다.

“물론 살아있지.” 왕자가 대답했다. “내가 왜 안 살아있겠어? 이 사람은 누구야?” 왕자가 일레프라를 보며 말했다.

“오빠의 생명을 구해준 분이죠.” 그웬 공주가 대답했다.

“내 생명을 구했다고?”

일레프라는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저는 그저 작은 도움을 드렸을 뿐입니다.” 일레프라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고드프리 왕자가 놀란 눈으로 공주에게 물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술집에서 술을 마신 거고, 그리고…”

“음독을 하셨습니다.” 일레프라가 설명했다. “아주 진귀하고 강력한 독이었어요. 누군가 왕자님을 없애려고 한 게 분명합니다.”

공주는 일레프라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공주의 머릿속에 독주를 마실뻔했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햇빛이 더욱 강렬하게 창문을 비췄다. 공주는 아버지께서 이곳에 함께 계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고드프리 왕자가 살아나길 바라셨던 게 분명했다.

“독을 제대로 마신 거죠.” 그웬 공주가 덧붙였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잖아요. 오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세요.”

고드프리 왕자가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생생하게 살아난 고드프리 왕자를 본 공주는 다시 한번 크게 안도했다. 고드프리 왕자가 살아났다.

“네가 내 목숨을 구했어.” 고드프리 왕자가 공주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왕자는 다시 일레프라를 바라봤다.

“두 사람 모두.” 왕자가 말을 이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일레프라를 바라보는 고드프리 왕자의 눈빛에서 그웬 공주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고드프리 왕자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랐다. 더욱 큰 감사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공주는 고개를 돌려 일레프라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공주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일레프라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가로질러 두 사람을 등진 채 약물을 챙겼다.

고드프리 왕자는 다시 그웬 공주에게 시선을 옮겼다.

“개리스?” 왕자가 엄숙하게 물었다.

고드프리 왕자가 무얼 궁금해하는지 잘 알고 있는 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빤 천만다행으로 살아났어요.” 공주가 입을 열었다. “펄스는 죽었어요.”

“펄스?” 깜짝 놀란 고드프리 왕자의 언성이 높아졌나. “죽어? 어떻게?”

“교수대에서 참형 당했어요.” 공주가 대답했다. “그 다음은 오빠 차례였고요.”

“그럼 넌?” 고드프리 왕자가 물었다.

공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개리스 왕은 저를 먼 곳으로 혼인시킬 계획이에요. 절 네바런스 족에 팔았어요. 아마도 지금 네바런스 족들이 절 데리러 이곳으로 오고 있을 거에요.”

고드프리 왕자는 화를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절대 두고만 보고 있진 않을 거야.” 왕자가 소리쳤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공주가 동조했다. “방법을 찾아야죠.”

“그렇지만 펄스가 없으면 증거를 댈 수가 없어.” 왕자가 말을 이었다. “개리스를 끌어내릴 방법이 없어. 개리스는 이제 증거가 없으니 죄값을 치르지 않게 될 거야.”

“우리가 방법을 찾아야 해요.” 공주가 대답했다. “우리는 방법을 찾을—”

순간 오두만 문이 열리며 햇빛이 오두막 안을 훤히 비췄고 열린 문으로 아코드와 펄톤이 들어왔다.

“공주님—” 아코드가 공주에게 말을 걸다 말고 고개를 돌려 고드프리 왕자를 바라봤다.

“이 나쁜 자식!” 아코드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고드프리 왕자를 바라봤다. “이럴 줄 알았어! 죽을 것처럼 날 속였던 거야, 죽을 것처럼 절 속인 거였죠!”

“전 그저 술 한잔으로 왕자님이 골로 가진 않을 거라 믿었어요!” 펄톤도 기쁜 듯 농담을 뱉었다.

아코드와 펄톤은 왕자에게 달려가 펄쩍 뛰어올라 왕자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아코드는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그웬 공주에게 말을 이었다.

“공주님, 갑자기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 멀리서 다가오는 병사들을 목격했습니다. 지금도 그 병사들이 이곳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웬 공주는 심각한 모습으로 밖으로 달려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공주를 쫓아 나와 언덕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저 멀리 내다봤다.

공주는 저 멀리에서 실버 전사들 몇 명이 오두막을 향해 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여섯 명의 전사들이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고 누가 봐도 오두막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고드프리 왕자가 서둘러 검을 빼기 위해 손을 뻗자 공주가 그의 팔을 막으며 안심시켰다.

“개리스 왕이 보낸 병사들이 아니에요. 캔드릭 오빠의 병사들이에요. 분명 우릴 위협하지 않을 거에요.”

병사들이 그들 앞에 모습을 보였고 달려온 병사들은 지체 없이 말에서 내려 그웬돌린 공주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공주님.” 대표로 보이는 병사가 입을 열었다. “희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 군대가 맥클라우드 군대를 몰아냈습니다! 공주님의 오빠, 캔드릭 왕자님은 안전합니다. 왕자님께서 공주님께 다음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토르는 안전하다.”

그웬 공주는 병사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감사함과 안도감에 휩싸인 공주는 벅찬 마음으로 고드프리 왕자를 끌어안았다. 왕자도 눈물을 흘리는 공주를 다독여줬다. 공주는 이제서야 자신의 삶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군대는 모두 오늘 돌아옵니다.” 병사가 말을 이었다. “왕실에서 거대한 축하행사가 열릴 예정입니다!”

“공주님.” 깊은 목소리의 전사가 공주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귀족이자 명망 높은 전사, 스로그였다. 그는 다른 병사들과 달리 맥길 왕국의 서부 지역을 상징하는 붉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공주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스로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각별했던 귀족이었다. 그는 공주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고 그런 그의 모습에 공주는 어쩔 줄 몰랐다.

“이러지 마세요, 주군.” 공주가 그를 만류했다. “제게 예를 갖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스로그는 수천 명의 군사들을 통솔하는 명망 높고 힘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서부 지역에 위치한 도시, 실레시아를 통치하는 귀족이었다. 실레시아는 서부 지역의 독특한 도시로써 캐니언 협곡 바로 밑으로 자리잡은 도시였다. 실레시아는 그 어느 군대로도 뚫을 수 없는 도시였다. 그런 도시를 책임지는 스로그는 선대 맥길 왕이 생전에 크게 신뢰했던 귀족이었다.

“저는 이 병사들과 함께 이 곳에 달려왔습니다. 왕실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스로그는 이미 모든 사실을 접한 듯 공주에게 설명했다. “왕좌가 불안정합니다. 새로운 지도자, 단단하고 진실된 지도자가 왕좌에 앉아야 합니다. 선대 폐하께서 생전에 공주님을 후계자로 삼으셨다는 얘기가 제게도 전해졌습니다. 선대 폐하께서는 제게 혈육과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선대 폐하의 뜻은 제게 절대적인 힘을 가집니다. 저는 공주님께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공주님께서 왕국을 통치하시면, 저와 저의 병사들은 공주님께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공주님께서 하루속히 결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사태가 바로 왕국에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걸 반증하고 있습니다.”

그웬 공주는 황당함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공주는 스로그 귀족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의 행동 덕에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이란 말에는 부담감이 밀려왔다.

“진심으로 그 마음이 감사합니다, 주군” 공주가 대답했다. “주군의 충정과 제안이 황송할 따름입니다. 심사 숙고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병사들과 토르를 환영하는데 집중하고 싶습니다.”

스로그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때마침 저 멀리서 경적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 내다보니 벌써 눈 앞에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고 그 사이로 군대의 행렬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주는 한 손을 들어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피해 눈을 가렸다. 이렇게 먼 곳에서도 군대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군대의 행렬의 중심에 선 인물은 다름아닌 토르였다.

제 11장

토르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왕실로 향하는 수천 명의 병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렸다. 여전히 한 편으로는 어안이 벙벙했다. 토르는 전쟁 속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뿌듯했다. 패전의 위기 앞에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적군들을 마주한 자신이 대견했다. 또한 그런 전쟁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전쟁이 모두 꿈처럼 지나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자신의 힘을 불러낼 수 있었던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토르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힘이 때때로 소용 없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힘이었다. 더군다나 그 힘이 어디서 소환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발산해내는지도 의문일 뿐이었다. 그런 연유에서 최고의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알 수 없는 힘에 의지하기 보단 다른 전사들처럼 끊임없을 훈련을 거듭해야 되겠다고 다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진정 최고의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사로서, 또 마법사로서 발휘하는 두 가지 힘이 모두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군대는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왕실로 달렸다. 토르는 기쁨에 취해 날아갈 것 같으면서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첫 번째 태양이 하늘 위로 떠올랐고 넓은 창공이 노란 빛과 분홍 빛을 발하며 끝도 없이 펼쳐졌다. 마치 처음으로 세상을 접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토르 주변으로는 리스 왕자, 오코너, 엘덴, 쌍둥이들이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 캔드릭 왕자와 콜크 사령관 그리고 브롬 총사령관이 수백 명의 부대원들, 실버 전사들, 왕의 병사들을 이끌며 함께 달렸다. 토르는 군대의 가장자리가 아닌, 주요 사령관들 한가운데에서 말을 타고 달렸다. 전쟁 이후 모두가 토르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제는 부대원들뿐만이 아니라 노련한 전사들까지도 토르를 인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토르는 맥클라우드의 모든 병사들을 홀로 맞서 상대했고 패전의 위기에서 승전 보를 울렸다.

토르는 부대원 친구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뻤다. 친구들이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이 큰 만큼 함께했던 세 명의 안면이 없던 부대원들의 죽음에 대한 상심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들을 구하지 못한 데 죄책감을 느꼈다. 온통 피로 범벅 됐던 맹렬한 전투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을 깜빡일 때마다 자신에게 달려들던 적군들의 모습과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갖가지 무기들이 떠올랐다. 맥클라우드 병사들은 잔인했고 그들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이 행운이었다. 또다시 그들을 대면하게 되면 토르에게 어제와 같은 행운이 따를지는 의문이었다. 언제 다시 자신에게 내제된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었다. 다시 그런 힘이 발휘 될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토르는 답이 필요했다. 또한 자신의 어머니도 찾아야 했다.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밝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아르곤을 만나야 했다.

크론이 토르 곁에서 울부짖었다. 토르는 허리를 숙여 크론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크론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하듯 토르의 손을 핥았다. 다행히 크론이 전쟁에서 목숨을 건져 토르는 크게 안도했다. 토르는 전쟁이 끝난 뒤 크론을 안아 자신의 말 뒤에 실었다. 크론은 걸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토르는 크론의 몸을 쉬게 하고 오랜 여정의 피로를 풀게 하고 싶었다. 크론은 적군에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다. 토르가 보기에 크론의 갈비뼈가 부서진 것 같았다. 토르는 크론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크론은 토르에게 동물이라기 보다는 형제 같았다. 자신을 몇 번이고 구해준 크론이 너무나도 감사한 존재였다.

눈 앞에 펼쳐진 길을 따라 언덕의 정상을 넘으니 발 밑으로 영광에 빛나는 왕실의 모습이 펼쳐졌다. 수십 개의 탑과 첨탑이 우뚝 솟아 있고, 고대의 석조 벽과 교각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낸, 아치형의 출입구가 곳곳마다 입구를 지키고 옥상과 길목마다 수백 명의 근위대가 보초를 서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농지가 늘어서있고 그 모든 중심부로 왕실이 위치한 장대한 경관이 펼쳐졌다. 그 모습에 토르는 즉각적으로 그웬 공주를 떠올렸다. 공주야말로 토르가 전쟁을 버틸 수 있는 원천이었고 자신의 삶의 이유였다. 자신이 함정에 빠져 적군들에게 매복 당했을 때 토르는 공주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가 왕실에서 안전하길 바랬다. 자신이 겪는 이 모든 배반적인 기운이 공주에게까지 손길을 뻗지 않기만을 바랬다.

저 멀리서 함성 소리와 함께 햇빛 아래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햇빛에 눈이 부셔 가늘게 눈을 뜨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왕실 앞에 펼쳐진 길 위로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국기를 흔들고 있었다. 군중들이 승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군대를 환영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울리는 경적 소리에 토르는 자신이 속한 군대가 크게 환대를 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생에 처음으로 이방아 라고 여겼던 스스로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저 경적소리, 널 위한 거야.” 토르 곁에서 말을 달리는 리스 왕자가 존경의 눈빛을 담아 토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이번 전쟁의 영웅이야. 이제 백성들의 영웅은 너야.”

“생각해봐, 겨우 부대원일 뿐인 우리 중 한 사람이 맥클라우드 왕가의 모든 군대를 물리쳤잖아.” 오코너가 자랑스레 설명했다.

“네가 부대원 전체에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일을 해 준거야.” 엘덴이 동조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우릴 좀 더 대단하게 여길 거야.”

“네가 우리 모두를 구해준 건 말할 것도 없고.” 콘발이 덧붙였다.

토르는 으쓱한 마음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엔 혼란이 앞섰다. 토르는 자신이 다른 부대원들처럼 아직은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패배가 분명한 전쟁을 승리로 돌려놨다.

“그냥 내가 훈련 받은 대로 했을 뿐인데.” 토르가 대답했다. “우리가 함께 받은 훈련들. 난 누구보다 뛰어나지 않아. 그냥 그날 행운이 따랐던 것뿐이야.”

“행운 그 이상이었다고 말해야지.” 리스 왕자가 대답했다.

군대는 계속해서 왕실로 향하는 가장 큰 길을 따라 달렸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환호를 하며 거리 위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의 손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맥길 왕가의 푸른 색과 노란 색의 현수막이 들려 있었다. 대단한 퍼레이드 행렬이었다. 왕실 전체와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고 그들의 표정엔 안도와 기쁨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토르는 그들의 표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맥클라우드 병사들이 이곳까지 접근했다면, 이 곳은 모두 황폐하게 무너져버렸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토르는 수천만 명의 병사들 속에서 엄청난 인파를 가르며 계속 말을 타고 나아갔다. 군대는 목조 다리를 건넜고 다리 위를 건너가는 말들의 우렁찬 말발굽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이후 군대는 아치형의 석조 출입구를 통과해 지하 통로를 지나 왕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엄청난 군중들이 환호를 하며 군대를 반기고 있었다. 그들은 깃발을 흔들고 사탕을 던지며 군대를 환영했다. 때맞춰 악단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고 심벌이 울리며 드럼이 박자에 맞춰 쿵쿵거렸다. 사람들은 이에 맞춰 흥겨운 춤을 췄다.

너무 많은 인파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자 토르는 다른 병사들처럼 말에서 내렸다. 말에서 내린 토르는 손을 뻗어 크론을 말에서 내려준 뒤 크론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크론은 처음에는 절뚝거리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걷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이에 토르는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크론은 몸을 돌러 토르의 손바닥을 몇 번이나 핥아줬다.

군대는 왕실의 광장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알지도 못하는 군중들이 다가와 토르를 끌어안고 어깨를 두드렸다.

“우릴 구해줬어!” 한 늙은 남자가 소리쳤다. “우리 왕국을 해방시켜줬어!”

토르는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수백, 수천만 명의 군중들이 일제히 환호하고 주변으로는 악단의 음악 소리가 크게 울리는 바람에 토르의 목소리가 묻혀 버렸다. 잠시 후 술통이 밖으로 옮겨졌고 사람들은 다 함께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웃었다.

그러나 토르의 마음속엔 오직 한 사람 생각뿐이었다. 그웬돌린 공주. 공주를 찾아야 했다. 토르는 군중 속에서 그웬 공주의 얼굴을 찾았다. 분명 이곳에 공주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공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토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네가 찾는 아가씨는 저쪽에 있는 거 같은데.” 리스 왕자가 반대쪽을 가리키며 토르에게 말했다.

리스 왕자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 토르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곳에는 입가에 안도의 환한 미소를 짖고 토르를 향해 빠르게 걸어오는 그웬돌린 공주가 있었다. 공주는 밤새 잠을 설친 듯 보였다.

공주의 모습은 한층 더 아름다워 보였다. 공주는 서둘러 토르에게 다가와 토르의 품에 쏙 안겼다. 공주가 뛰어올라 양 팔로 토르를 끌어 안았고 토르도 그런 그녀를 꼭 껴안고 제자리에서 뱅뱅 돌았다. 토르에게 꼭 매달린 공주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토르의 목덜미가 젖었다. 토르는 자신을 향한 공주의 사랑과 공주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야, 무사히 돌아왔어.” 공주가 기쁨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 생각밖에 없었어.” 토르가 공주를 꼭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공주를 품 안에 안은 이 순간 모든 것이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르는 천천히 공주를 안은 손을 놓았고 공주는 토르를 마주보고 고개를 올려 입을 맞췄다. 주변으로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두 사람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공주와 토르는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입을 맞췄다.

“그웬돌린 누나!” 리스 왕자가 기쁜 마음으로 공주를 불렀다.

공주는 몸을 돌려 리스 왕자를 꼭 끌어안았다. 마침 고드프리 왕자가 다가와 토르와 리스 왕자를 양 팔로 감싸 안았다. 가족의 재결합이 이뤄지는 순간이었고 이 순간 토르는 자신도 이들과 함께라는 소속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도 왕족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모두가 선대 맥길 왕을 향한 사랑과 개리스 왕에 대한 분노로 한마음을 나눈 사람들이었다.

크론이 이들 사이를 파고들어 그웬 공주에게 뛰어올랐다. 공주는 허리를 숙여 크론을 안아 올렸고 크론은 공주의 얼굴을 핥았다.

“넌 볼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구나!” 공주가 크론의 빠른 성장에 감탄했다. “토르를 무사히 지켜준 데 대해 어떻게 보답을 해줄까?”

크론이 계속해서 공주에게 기어 올라갔다. 결국 공주는 웃음을 터트리며 크론을 쓰다듬었다.

“어서 여길 벗어나자.” 공주가 곳곳에서 지나가는 인파에 부딪히며 토르에게 말했다. 공주는 손을 뻗어 토르의 손을 잡았다.

토르도 손을 내밀어 공주의 순을 잡고 공주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디선가 여러 명의 실버 전사들이 토르에게 다가와 뒤에서 토르를 들어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렸다. 토르가 공중으로 떠오르자 군중 속에서 커다란 환호가 일었다.

“토르그린!” 군중들이 다 함께 외쳤다.

토르는 몇 번이고 빙빙 돌았다. 이내 토르의 손에 술잔이 쥐어졌고 토르는 고개를 들고 술잔을 비웠다. 군중들은 그런 토르의 모습 하나하나에 크게 열광했다.

털썩 주저앉은 토르는 사방에서 군중들이 모여들어 자신을 끌어안자,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웃었다.

“우린 이제 축하연에 갈 거야.” 토르와 안면이 없던 실버 전사가 육중한 손으로 토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전사들만을 위한 축하연이지. 진정한 남자를 위한. 너도 참석해야 해. 네 이름으로 예약된 좌석이 있을 거야. 그리고 너도, 또 너도.” 실버 전사는 리스 왕자와 오코너와 토르의 친구들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이제 너희들도 남자야. 그러니 우리의 축하연에 참석해야 해.”

실버 전사들이 토르와 부대원들을 이끌고 가자 군중들은 더욱 크게 환호했다. 토르는 겨우 빠져 나와 황급히 공주를 바라봤다. 공주를 또다시 혼자 두고 싶지 않은 마음에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저들과 함께 가.” 공주가 사심 없이 말했다. “참석하는 게 중요해. 부대원들과 축하연을 즐겨야지. 그들과 함께 승전을 축하해. 그게 실버 전사들의 전통이야. 절대 빠지면 안돼. 이따가 무기의 전당에서 만나자. 그럼 그때 함께 있을 수 있어.”

토르는 고개를 숙여 공주에게 입을 맞췄다. 할 수 있는 한 아주 오랫동안 공주를 안았지만 이내 부대원들이 토르에게 다가와 짓궂게 토르를 끌고 갔다.

 

“사랑해.” 공주가 토르에게 말했다.

“나도 사랑해.” 토르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눈 앞에 자신을 향한 사랑을 가득 담은 아름다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공주를 바라보며 부대원들에게 끌려가는 토르의 마음 속에는 그 무엇보다 공주에게 청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공주를 영원히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청혼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너무 일렀다. 토르는 애써 스스로를 다그쳤다.

어쩌면 오늘 밤도 너무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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